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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창세기26장

창세기 26장

 

26장을 읽으세요.

 

요약: 이삭이 주인공으로 전면에 등장한다. 그는 그랄에서 리브가 누이호칭 사건을 일으키게 되고, 농사를 지어 백 배나 되는 수확을 거두고 여호와께서 주신 복으로 거부가 된다. 그는 또한 우물 분쟁 사건을 잘 해결함으로써 더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브엘세바에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다시 한 번 그에게 확인시켜 주신다.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1절)

 

우리는 보통 인생에서 흉년이 들면 ‘망쪼가 들었다’고 하며 한숨부터 쉴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그게 아닌 것 같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 약속하신 것을 본다면 이들에겐 흉년 같은 일이 생길리가 없고 생겨서도 안된다. 하지만 대(代)를 이어 흉년이 들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어찌된 일인가. 우리는 항상 이렇게 생각하고 원한다. ‘하나님을 믿으니 모든 일이 잘 되고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다.

특이한 것은 아브라함의 가나안 이주 초에 기근이 있었고, 이삭도 아버지의 사후(死後) 자신의 시대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기근(흉년)이 들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기근을 통해, 예비해 놓으신 복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거주하던 땅에 흉년 같은 것은 얼씬도 못하게 하시는 정적(靜的)인 방법을 쓰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주심으로 이삭을 훈련시키시며 흔드시고 사람들과 부딪히게도 하시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화위복이 됐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즉 동적(動的)인 방법을 쓰신 것이다.

2절을 의하면 이삭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애굽으로 가기 전에 임시 피난처로 ‘그랄’에 간 것으로 보인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 (1절)

 

이 아비멜렉은 20장에 나오는 아비멜렉과 동일한 사람인가 아닌가?

같은 인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20장에 나오는 군대장관 ‘비골’이 군대장관 직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면, 그가 여전히 군대장관 노릇을 하고 있으므로(26절) 그 때와 약80년의 간격이 있어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도 같은 인물로 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10절을 유추해석해 보면 그가 나이가 많은 왕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나이가 젊었다면 리브가를 취하려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가지는 오래 전 사라 사건으로 몸을 사릴 수도 있었으리라는 가정하에 동일인물로 볼 수도 있다.

여러 해석과 정황에 의해 블레셋 왕 ‘아비멜렉’을 애굽 왕 ‘바로’ 처럼 왕의 호칭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렇게 보면 ‘비골’도 직책명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20장에 나오는 아비멜렉이 90세가 된 사라를 취하려 한 것을 보면 그 당시 아비멜렉의 나이도 상당했으리라 추측이 가능하다. 전적인 가정으로 20장의 아비멜렉이 사라 사건 당시 최소 6~70세 정도 됐다고 본다면, 본 장의 아비멜렉은 20장의 아비멜렉의 아들이거나 후임 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2절)

 

드디어 이삭의 시대가 열렸다는 생각이 든다. 공식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24장에서 본 바와 같이 이삭은 묵상을 즐겨하는 사람이었기에 묵상 중에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러셨더라도 그것은 비공식적인 것이다.

②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셨고 이삭에게는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하심으로, 약속의 땅을 매개로 하나님과의 언약은 대를 이어 유지된다.

 

 

이 땅에 유하면 (3절)

 

위에서도 본 바와 같이 2절에 의하면 이삭은 분명 비옥한 ‘애굽’으로 가려 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는 것을 막으신다. 애굽은 나일강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이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의 예(例)를 따라 그 곳으로 가서 기근을 피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에 거하는 것이 ‘함께 해 주시고’ ‘복을 주시는’ 전제 조건이다.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착각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겠지 복 주시겠지 도와 주시겠지… 이렇게 말이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4절)

 

① 이 구절은 12:2~3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약속하신 이후에 13:15~17; 15:5,18; 17:2,6,8; 18:18;  22:17~18에서 계속적으로 확인되었고, 이제 아버지 아브라함을 계승한 아들 이삭에게도 그 ‘언약’이 이뤄지리라 재차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② 사실 오늘날처럼 인구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한적한 곳을 찾는 시대에는 이 말씀이 별로 와 닿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는 말씀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와 백성을 만드시려는 하나님 언약의 핵심이 된다.

③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아주 좋아하신 것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사는 인간들 중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교류하며 사는 사람들 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수다한 자손에 포함되어, 모든 땅을 차지하고, 원수를 이기고 대적의 문을 얻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분명 구별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별되어야 하며, ‘만인구원설’과 같은 엉터리 학설은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 만인구원설[ 萬人救援說, Universalism ]

 

보편구원론이라고도 함.

모든 인간은 구원받는다는 신념.

만인구원설은 기독교 역사에서 여러 번 등장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의 저술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며, 조직화된 운동으로는 18세기 중엽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칼빈주의 신학의 엄격한 측면들을 완화시켜 만인구원의 교리가 다시 등장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해준 데에는 계몽주의의 영향이 컸다. 만인구원주의자들은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 인류의 일부만을 선택하여 구원하고 나머지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운명으로 창조했을 리가 없으며, 내생의 일정 기간 동안만 형벌을 받아서 영혼이 정화되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기를 준비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만인구원설 선구자는 조르주 드 벤네뷰(1703~93)로서 그는 1741년 유럽에서 펜실베이니아로 이주해 와 이곳에 사는 유럽인과 인디언을 대상으로 설교와 의료활동을 폈다. 초기의 만인구원설 운동에 가장 큰 추진력이 된 것은 존 머리(1741~1815)의 설교였는데, 그는 1770년 영국에서 식민지 아메리카로 이주해와서 식민지 전역에 이 교리를 전파했으며, 만인구원설이 사람들을 부도덕하게 만든다고 믿었던 정통 기독교인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존 머리의 만인구원설은 일종의 수정된 칼빈주의였으나, 18세기말 만인구원주의자들은 칼빈주의 교리를 거부하고 호세아 벌루를 추종했다. 벌루는 유니테리언주의의 신(神) 개념을 도입해 그리스도의 속죄를 재해석했다. 즉, 예수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드러내주는 사건으로 보았고 종교에서 이성의 역할을 크게 강조했다.

19세기초부터 만인구원주의자들은 많은 견해와 관습이 유니테리언주의와 같았기 때문에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두 교파의 전국 조직체인 미국 만인구원주의자 교회와 미국 유니테리언 연합을 합하려는 노력이 여러 면에서 이루어졌고, 그것은 1960년 유니테리언 만인구원론자협회를 창설해 1961년에 공식적으로 두 단체를 병합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만인구원주의자 교회는 교회행정면에서 회중교회의 성격을 띠었다. 각 교회는 교회의 일을 스스로 처리했고, 그밖의 구역교회나 지역단체들과도 제휴했다. 유니테리언 만인구원론자협회는 각 지역교회와 구역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만인구원주의 운동에 미국 전체의 입장을 드러내려 했다. 회중교회 정책에 따라 각 만인구원주의 교회는 그 나름대로의 예배형태를 자유로이 선택했다. 단순하고 비의식적인 예배형태가 가장 보편적이며 설교에 큰 비중을 두었다.

만인구원주의자들은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신앙의 내용 면에서 상당히 견해가 다양했다. 신앙 고백문을 작성하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했으나 1935년말 겨우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자유주의, 개인적 해석의 자유, 다양성의 용인, 신학 및 교회문제 접근방식의 일치, 인간본연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 등이 만인구원설 운동을 하나로 지속시킨 강력한 요소가 되어왔다. 일반적으로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교에서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며, 과학적 발견에 비추어 신앙을 수정할 것을 역설한다. 따라서 그들은 전통 기독교의 기적의 요소들을 현대 지식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배척했다. 예수를 한 위대한 교사이며 본받을 만한 모범으로 간주할 뿐 신적인 존재로는 보지 않았다. 20세기에는 좀더 폭넓은 만인구원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만인구원주의자들은 기독교 전통과의 유대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종교의 보편적 요소들을 추구하면서 기독교 이외의 타 종교들과 밀접한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유니테리언주의 (출처: 네이트 백과사전)

 

    ☎ ⓐ전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현(1961년)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가장 위대한 신학자’ 라고 칭했던 칼 바르트가 바로 이 ‘만인구원론’을 가르쳤다는 사실 자체가 이것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성경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는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로이드 존스 앤솔러지, p144, 지평서원刊)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6절)

 

① 12절에서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라고 한 것으로 봐서 일단 이삭이 ‘그랄’에 머무는 것이 2절의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에 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② 그러나 뒤에 이삭이 그랄 골짜기로 옮기게 되고 다시 한번 브엘세바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25절). 물론 이삭이 옮겨 다니는 땅을 전체로 ‘가나안’으로 넓게 본다면, 여호와께서 지시하시는 땅은 한 곳이 된다.

③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일생을 보면 나그네의 삶을 산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노력해서 이만큼 일구고 모았으니 여기에 찰떡을 붙여놓은 것 같이 꼼짝 않고 천년만년 살리라… 과연 이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일까?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 가라 하시는 땅 그곳에 기근이 기다리고 문제가 나를 맞이한다 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에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그가 말하기를 그(녀)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7절)

 

① 이삭은 진정 자신의 목숨만 유지된다면 리브가를 빼앗겨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랄 사람들은 남의 아내를 빼앗을 사람들이 아닌데 이삭과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소위 ‘설레발’ 짓을 한 것일까?

② 아브라함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이삭은 매우 침착하고 얌전한 사람이었다. 그런 두 부자(父子)가 파렴치한 사람 비굴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일을 대(代)를 이어서 왜 했을까 생각해 보자.

③ 앞서 20장에서 많은 설명을 했기에 조금만 추가해 보기로 한다. 이삭은 리브가를 누이라고 하고, 그랄에서 오래 머물다가 그랄 왕에게 부부사이인 것이 발각되었다(8절). 7절에 의하면 이삭은 분명히 그랄 지방의 형편을 파악하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즉 아내를 누이라 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으리라는 것 말이다. 그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④ 렘38:24 이하에 보면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소위 거짓말을 요구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건에서 굳이 선순위 가치를 따져본다면, 시드기야 왕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는 것이 최우선 순위이고, 예레미야가 하얀 거짓말을 포함한 어떤 거짓말도 하지 않는 것이 그 다음이고 시드기야의 방백들이 진실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의 것을 중요시하여 예레미야가 소위 진실을 말했다면 최우선 순위의 가치가 훼손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시드기야의 방백들이 시드기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항복하는 것을 막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방백들이 ‘시드기야와 예레미야의 대화’를 곧이 곧대로 알 필요는 없다라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위해 하나님 말씀의 가치를 훼손시키지 말라!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0절)

 

아비멜렉은 전형적인 세상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뒤집어 씌우는 거 말이다.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든 누이 동생이든 간에 이삭의 보호를 받고 있을 것이고, 리브가도 설사 자신이 이삭의 누이라고 여겨졌을지라도 그랄 땅의 남자 품에 안길리가 결코 없을 것인데 아비멜렉은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하였은즉’ 이라며 괴이한 말을 한다.

② 이 아비멜렉의 말을 뒤집어 보면 이렇게 된다. 우리 땅 사람들은 강제로 여자를 빼앗거나 강간한다. 리브가가 누이였다면 그랄 땅 아무 남자에게나 안길 수 있는 정숙하지 못한 여자다. 등등

③ 그러나 리브가는 어떤 여자인가. 아비멜렉 같은 사람이 감히 평가조차하기 어려운 그런 여인이다. 모르면 24장을 참조하라!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11절)

 

‘범하는’ 이란 ‘손을 대는’(touch)의 뜻이다. 거짓말을 해도 잘~ 살 수 있네요. 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소위 ‘삽질’이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약속의 제2대 조상인 이삭과 리브가는 살아 남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최선의 가치이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한가지는 이삭의 ‘리브가 누이 호칭 사건’으로 피해를 봤거나 손해를 봤거나 죽어 나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보통 거짓말을 하면 주위의 누군가는 반드시 피해나 손해를 볼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은 안되는 것이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12절)

 

① 기근과 흉년 뒤의 대박이다. 우리도 모두 바라는 복이다. 백 배의 복이 어떤 복인지 아직 감이 안 온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연초에 천 만원을 주식에 투자했는데 연말에 십 억이 되었다. 이게 백 배다.

② 하나님께서 거하라는 땅에 순종하며 거할 때 받은 복이다.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Isaac  became rich, and continued to grow richer until he became very wealthy.).

③ 이삭이 백 배나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을 알아보자. 이삭이 농사를 지었던 네게브 땅은 어떤 기후 어떤 토질이었나? ☞ ‘네게브 지방은 유대 광야와 마찬가지로 비가 잘 오지 않는 지역이다. 네게브의 토양은 남쪽 나일 강 델타의 고운 모래흙이 바람에 날려와 형성된 충적토다. 이곳은 비가 천천히 조금씩 내리면 농사짓기에 알맞은 최고의 옥토가 되지만, 갑자기 많이 오면 모두 휩쓸려 내려가 농사를 짓지 못할 뿐 아니라 갑작스런 급류로 변한다.’(열린다 성경 광야이야기, 류모세 저, 두란노 간, p204). ‘이삭이 거한 네게브 사막의 충적토는 하나님이 주시는 비의 형태에 따라 ‘전부 아니면 전무’의 수확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나님은 네게브 지역의 토양을 적절하게 이용하셔서 이삭의 순종에 대해 백 배의 결실로 복을 주셨다.’(같은 책, p205).

 

이삭의 우물 사건에서 배울 교훈 (18~22절)

 

① 세상 사람들은 남이 잘~되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지 않는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가 잘 되는 것을 시기해서 아브라함 때에 판 모든 우물을 흙으로 메웠다(15,18절). 이 사건은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물이 없는 상황에서 그 많은 사람들과 가축들은 어찌 살라는 얘기인가. 물이 없다면 하루도 살 수 없는데 말이다.

②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도 두 번(에섹과 싯나)이나 팠던 우물을 포기한다. 이삭의 인격과 인내심 온유함 등을 높이 평가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③ 끝까지 싸움을 피하고 양보하는 이삭에게 하나님께서는 ‘르호봇’의 은혜(22절)와 ‘(브엘)세바’(32~33절)의 복을 주신다.

④ 그렇다. 싸움을 걸어오는 자를 피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면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마5:5의 복을 우리에게도 주실 것이다.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아브라함 죽은 후에 (18절)

 

 어떤 해석에 의하면(예를 들어 창세기,두란노아카데미刊,p334) 본 26장은 에서와 야곱의 출생 전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18절을 보면 분명히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버린 우물을 다시 팠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이삭의 나이는 최소 76세 이상은 됐으리라 생각되므로 그가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으므로 쌍둥이 아들들은 최소 16세는 된 때였다(히11:9 참조).

 

 

이삭이 그 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25절)

 

  ① 이제 한바탕 큰 일을 치르고 브엘세바로 올라 온 이삭에게 여호와께서는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는 약속을 해주신다. 그 하나님께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예배드리는) 모습에서 아브라함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12:7~8에서 한 것과 같이 단을 쌓고 장막을 쳤다. 교회와 가정을 항상 연결해 놓으라!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29절)

 

  ① 이삭이 잘~ 나가고 있다는 소문이 아비멜렉에 까지 들렸나 보다. 그는자기 땅에서 내쫓은 이삭에게 보복을 당하리라 생각했는지 몰라도 이삭을 찾아와 화친을 청하는 모습에서 또 한번 비굴한 인간의 행동을 보게된다. 이삭은 27절에서 자신을 미워하여 쫓아낸 사람이 찾아 온데 대해 볼멘소리를 한다.

② 우물을 막고 메워버린 사건이 얼마나 악하고 못난 행동인데 선한 일만 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아비멜렉은 능청스럽게 거짓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표’ 이삭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고 잔치를 베풀기까지 한다. 참 대단한 사람이다. 역시 하나님의 선택은 탁월하시다!

 

 

[문제26-1] 다음 중 틀린 것을 골라 보세요.

①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지시하시는 땅은 좁게 특정된 한 곳은 아니었지만 ‘애굽으로 가지 말라’ 하시는 방식으로 일정한 한계를 두셨다.

② 이번 흉년은 아브라함 때의 2번에 이은 3번째 흉년이다.

③ 이삭은 흉년을 피해 블레셋 땅 ‘그랄’로 갔고 거기서 기근을 피하게 되었다.

④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에 유하는 것이 복을 받는 길이다.

⑤ 이삭의 자손으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인데, 이는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 때문이다.

 

 

[문제26-2] 다음 중 맞는 것을 고르세요.

① 이삭이 리브가 껴안은 것을 블레셋 사람들이 보게 되었다.

② 이삭은 그랄 골짜기에서 백 배나 수확하게 되었다.

③ 이삭은 부자가 되었고 거부(巨富)가 될 때까지 그는 계속해서 재산이 늘어갔다.

④ 블레셋 사람들은 아브라함 때에 판 우물 두(二) 개를 막고 흙으로 메웠다.

⑤ 이삭이 그랄 골짜기에서 아버지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는데 그 첫번째 것이 ‘싯나’였다.

 

 

[문제26-3] 다음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이삭과 에서는 같은 나이에 아내를 얻었다.

② 에서는 유딧과 바스맛을 아내로 취했다.

③ 아비멜렉은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을 대동하고 이삭을 찾아 브엘세바까지 왔는데, 아훗삿은 아비멜렉의 책사(adviser)였다.

④ 아비멜렉은 이삭을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로 불렀다.

⑤ 이삭이 그랄 골짜기에서 아버지 때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팠는데 이 때까지 아브라함은 생존해 있었다.

 

 

 

암송 구절

3~5절

12~15절

20~22절

24~25절

 

 

정답

[문제26-1] ②

[문제26-2] ③

[문제26-3] ⑤

 

 

적용

㉮ 이삭의 ‘리브가 누이 호칭 사건’을 보는 당신의 견해는 무엇인가?

㉯ 이삭과 블레셋 땅 그랄의 연관성이 있다고 보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 이삭이 ‘에섹’과 ‘싯나’를 포기하는 것을 보는 당신의 생각은?

㉱ 이삭은 여호와께서 나타나신 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거기 장막을 쳤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Copyright © 2009 by Paul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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