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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변화시키는 요한계시록 설교를 위한 고찰: 목회자, 신학자, 시인으로의 설교자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요한계시록 설교를 위한 고찰: 목회자, 신학자, 시인으로의 설교자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이우제 (백석대학교)

 

I. 서론:

일반적으로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되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요한계시록은 한국 교회 안에서 두 극단적인 태도로 설교되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지나친 결핍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나친 과잉의 형태로 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건전한 기독교 신앙을 표방하는 교회 안에서 요한계시록의 해석과 설교는 전무하거나 극히 제한적인 본문에 편중되어 다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적지 않은 요한계시록의 본문이 교회 안에서 마치 한 번도 그 자태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처녀림으로 존재하는 것은 가슴 아픈 현실이다. 기존 교회의 형편이 이렇다 보니, 요한계시록은 오히려 불건전한 종말론적인 신앙의 온상이 되거나, 기독교 이단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기존 교회의 지나친 결핍이 나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왜 요한계시록은 그동안 기존 교회에서 이렇게 홀대(?)를 받게 된 것일까? 아마도 요한계시록이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기가 어렵다는 뿌리 깊은 편견 때문일 것이다. 물론 성경의 다른 책들에 비해서 요한계시록이 해석하기가 까다로운 것은 사실이다. 산 등정에 비유해서 말한다면, 요한계시록에는 유난히도 높고 험한 봉우리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요한계시록이 아예 설교하기가 불가능한 책으로 여기는 것은 온당치 않다. 우리들의 한계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천상의 메시지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메시지(교훈)는 너무나 확실하고 선명하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공유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기존 교회가 지나칠 정도로 요한계시록이라는 산에 입산하기를 두려워하는 사이에, 불건전한 종말론을 주창하는 사람들과 기독교 이단들이 중요한 고지를 점령하는 안타까운 상황들이 펼쳐지게 되었다. 그로 인한 피해가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조국 교회의 상황을 직시하여, 이제라도 요한계시록이 신실한 성도들을 미혹하는데 사용되는 단골 메뉴가 되지 못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에게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요한계시록을 나머지 성경 65권의 말씀과 분리된 부록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의 성경 계시와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성경 전체의 문맥을 떠난 요한계시록 해석과 설교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성경, 특히 요한계시록을 설교할 때 문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이 성경 전체와 연계되어져 있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설교가 지향해야 할 목표도 역시 전체 성경의 목표와 동일해야 할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렇다면 성경 66권이 지향하는 전체 목적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우리는 사도 바울의 견해에 집중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목적을 분명히 성도들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성경의 기능을 통해서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바로 계속되는 17절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도들로 하여금 먼저 온전하게 하고, 그 다음으로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라면 이러한 성경적인 정신에 근거하여 행하게 되는 우리들의 설교의 목적도 역시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신앙공동체의 진정한 삶에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삶의 변화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통하여 선한 일을 행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녁을 분명히 정하여 행하는 설득행위라고 할 수 있는 설교는 청중의 특정 반응을 염두에 두고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한 청중의 변화를 그 목적으로 한다.” 제이 아담스는 청중의 변화를 개인적인 측면으로, 각 사람을 믿음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어야 하고, 동시에 공동체적인 측면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숙해져 가는 것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웨인 맥딜(Wayne McDill)은 설교의 궁극적인 의도를 믿음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온전한 믿음을 위한 설교를 하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성경적인 믿음으로 사람을 세우는 것은 구원을 받게 하고 이미 구원받은 자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반응하며 살게 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또 다시 표현하면, 우리들의 설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설교를 통하여 진정한 회심을 이루고, 더 나아가 지속적인 회심의 과정으로 청중들을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청중의 변화라고 하면, 그저 어떤 이의 행실이 바뀌는 것에만 염두에 두고 말할 때가 있다. 행동의 변화(순종)에만 초점을 두고 그것만을 진정한 변화라고 할 경우에,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변화는 일반 심리학이나 교육학에서 말하는 행동주의”(behaviorism)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의 변화는 그저 외적인 형태적으로 드러나는 행실의 문제로만 국한 지어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지점으로 나아가기 전에 두 가지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가치관의 변화가 중요하다. 세상 나라의 가치를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청중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성품의 변화인 것이다.그렇다면 청중의 변화란 다음 세 가지를 구비해야만 한다. 그것은 가치관(의식)의 변화,” “성품의 변화그리고 행동의 변화인 셈이다. 여기서 순서는 가치관의 변화와 성품의 변화가 우선시 되고 그 후에 행동의 변화가 뒤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들이 요한계시록 설교하는 이유는 단지 사이비 종말론의 도전과 이단들의 집요한 공격에 대처하기 위한 기독교 신앙의 변증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그들의 공격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한 것도 요한계시록을 설교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지만, 결코 거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보다 더 중요한 목적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고난의 시대를 삶아가는 믿음의 사람들, 즉 신앙공동체를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데 두어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당시의 성도들이 로마제국으로 상징되는 바벨론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듯이, 오늘도 성도들도 여전히 바벨론 제국의 도전 가운데 신음하며 살고 있다. 비록 박해의 형태를 띠고 바벨론이 우리 가운데 다가와 있지는 않지만, 일상적 제국의 모습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다른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들어 낼 것인지가 요한계시록 설교의 중심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본 논문의 의도는 바로 이러한 반성에서부터 출발하여, 삶을 변화시키는 요한계시록 설교에 대한 길을 모색하려는데 있다. 이를 위하여 필자는 요한계시록을 사도 요한이 목회자, 신학자, 그리고 시인으로 기록했다는 유진 피터슨의 제안과 설명에 기초하여 그 세 가지 이미지를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 방향과 연결시켜 논의해 보고자 한다. 설교자로서 사도 요한의 목회자, 신학자, 그리고 시인으로의 정체성을 삶을 변화시키는 요한계시록 설교를 위한 중요한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II. 목회자로서의 설교자의 정체성과 신앙공동체의 삶의 변화를 목표하는 요한계시록 설교

1. “목회자로서의 설교자의 정체성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요한계시록 설교를 위하여 중요한 설교자의 자기 정체성은 목회자의 이미지로 설명할 수 있다. 탁월한 영성 신학자로 잘 알려진 유진 피터슨은 사도 요한이 목회자의 자세와 심정으로 요한계시록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목회자는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사람이다. 특히 고통 속에 있는 자들과 함께 거하며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다. 이렇게 볼 때, 목회자의 이미지는 청중들의 삶의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대사로서의 설교자와 비교해 보면 목회자로서의 설교자는 훨씬 청중 지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사로서의 설교자는 설교에 있어서의 수직적이고 초월적인 측면만을 중요시하는 이미지이다. 왕의 말씀을 전하는 전령자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 전령자 혹은 대사에게 있어서는 위탁된 메시지를 그대로 전하는 것이 제일로 중요하다. 왕이 명령한 메시지를 가감 없이 선포하는 것이 대사의 사명인 것이다. 대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메시지에 대한 충성이다.

이에 반해서 탁월한 설교학자인 토마스 롱의 구분에 의하면 목회자의 이미지는 설교를 듣는 청중의 민감하게 반응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청중 중심적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로서 설교자는 청중의 요구를 알고 그것에 부응하는 일에 대사로서의 설교자보다 훨씬 민감해야 한다. 설교자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 (때로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여 그것을 해결하고 회복시켜 주는 적절한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이러한 목회자의 이미지의 약점은 자칫 지나친 인간 필요에 초점을 맞추는 개인주의적인 경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에 있다. 토마스 롱이 잘 지적했듯이, 사람들이 교회에 들러자신이 생각하는 필요를 충족시켜주기를 바라는 문화에서 목회적 설교는 결국 이기주의만 확대시킨 채 자신을 버리고 이웃을 위해 봉사 하라는 복음의 요구는 묵살당하기 쉽다.

이렇게 될 때 복음의 사사화(privatization of the Gospel)가 이뤄지게 된다. 복음이 사사화 된다는 것은 복음의 효력이 미치는 파장을 인류 역사와 전 우주의 공동체적 구원과 변혁에까지 확장시키지 않고 한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더 효과적인 설득력 구조(plausibility structure) 하나를 선택하고 더 효과적인 심리 기제(psychological mechanism) 하나를 소비하는 개인의 선택 문제로 국한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복음의 사사화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하나의 신적인 힘처럼 작용하고 있는 소비자 중심주의와 같은 궤적을 향해가면서 성도들을 자신들의 종교 기호에 부합하는 메시지를 소비하는 종교 소비자가 되게 한다. 성도를 종교 소비자로 만들게 된다면, 결국 신앙 공동체는 세상 정신에 포로가 되어 빛바랜 모습으로 역사의 비탈길로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램시 주니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목회자의 이미지의 근거한 설교는 기독교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종교적 소비자중심주의로 전락시킬 우려가 있다. 저들은 설교가 나의 필요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들을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목회자로서 설교자의 정체성은 신앙공동체의 참된 변화를 위한 적절한 이미지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유진 피터슨은 어떤 차원으로 요한을 목회자로 정의하고 있는 것인가? 그에게 목회자 요한은 그저 사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심리적인 문제를 개별적으로 해결해 주는 상담가 내지는 치유자의 이미지에 국한된다고 보아야 하는가? 물론 유진 피터슨의 목회자의 개념이 토마스 롱의 전제와 일치하는 대목도 있다. 청중들의 고통과 함께 하는 자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수직적인 이미지보다는 수평적인 연대를 강조하는 것도 유진피터슨의 목회자에 대한 이해가 토마스 롱이 말하는 이미지와 유사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시해야 할 것은 동일한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 용어의 전제에 있어서 큰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이 제안하는 목회자의 개념은 복음의 사사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위험과는 거리가 멀다. 유진 피터슨에게 요한이 목회자라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이다. 그에게 목회자라는 이미지는 성도들과 동떨어진 진공상태에서 천상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복음은 구체적인 상황과 관계없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목회자는 구체적이고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그 시대와 함께 아파하고 함께 몸부림치는 존재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해석과 설교의 문제점은 요한이 목회자로서 글을 쓰고 있다는 인식의 부족에 기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시대의 설교자들이 범하는 실수는 요한계시록을 1세기의 정황 가운데서 그 당시의 성도들과 함께 고통의 연대 속에 있었던 요한의 글로 보지 않은 채, 시간과 공간의 캡을 가뿐히(?) 뛰어넘어 우리 시대를 위한 메시지나 미래의 지구 호의 운명을 예견하는 책으로 둔갑시켜 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잘못된 시간 이해로 인하여 요한계시록을 하늘로 뚝 떨어진 진공상태 속에 주어진 무시간적인 교훈으로 취급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과 오해가 바로 잡혀야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제대로 된 메시지기 선포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이 일곱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글을 쓸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으므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요한은 교회 지도자로서 그 어떤 특혜나 기득권을 누리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당시의 신앙공동체와 함께 환난에 동참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가 환난에 동참하고 있는 증거가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는 모습에서 확인될 수 있다. 그러니까 유진 피터슨에게 있어서 목회자는 개인적인 필요나 치유를 위한 상담가나 치료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앙공동체를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 자신도 기꺼이 고통의 길을 가는 사람인 것이다. 목회자 요한은 신앙공동체 안에 있으나 동시에 신앙공동체를 앞에서 이끌어 가는 리더라고 할 수 있다. 그들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이 그들을 이끌 수 있는 파워와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 요한은 사람들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선두에 서서 신앙공동체를 어디로 이끌어 가기를 원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유진 피터슨은 매우 귀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그는 한마디로 목회자 요한이 그들을 중간기를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이끌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도 마찬가지이지만,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대의 청중들은 중간에사는 사람들이다. 중간에 산다는 것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우리 하나님이 모든 일의 시작과 마침이 되신다는 것이다. 시작도 선하고 아름답다. 마침도 선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시작과 마침이 좋을 것이기에 그 중간도 좋은 것으로 가득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는 중간기의 삶은 우리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중간 시기는 말 그대로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곳이다. 중간에 살면서 우리는 언제나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목회자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목회자는 그 중간에 서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아름다운 시작에 대한 상기와 행복한 결말에 대한 소망으로 견디게 하는 사역에 부르심 받은 자이다. “목사는 그 중간에서믿음의 사람들과 동행하는 일이 전공인 사람인데, 갖가지 궂은일과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과 모욕적인 악을 겪으면서도, 이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꼴사나운 중간이 실은 눈부신 시작과 영광스러운 끝과 통하는 길임을 언제나 줄기차게 주장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중간에 서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목회자 요한의 역할을 통하여 그 당시 일곱 교회가 받게 된 유익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유진 피터슨의 대답은 이렇다. “이런 목회자의 섬김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이 주신 길을 가고 있는 이상 때로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을 때라도 핍박을 견뎌낼 수 있다고 점차 할 수 있었다.” 이상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유진 피터슨이 제시하고 있는 목회자의 이미지는 개인주의 덫에 걸리는 위험이 있는 일반적인 개인 심리 치료나 상담자와 유사한 목회자의 이미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개념인 것이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목회자는 중간 시대를 사는 신앙공동체를 시대의 가치와 정신에 함몰되지 않고 궁극적으로 완성될 종말의 가치와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로서 설교자는 다름 아닌 신앙공동체의 진정한 변화를 추구하는 사역을 하는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요한계시록 설교의 목적인 신앙공동체의 삶의 변화

지금까지 목회자로서 설교자의 이미지를 통하여 논의한 것에 기초하여 이제, 보다 본격적으로 요한계시록 설교의 목적인 사람들의 진정한 변화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해야 할 시점이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설교를 듣는 회중을 변화로 이끄는 설교란 한마디로 대항문화적인 방식(countercultural way)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설교의 목적이 반드시 요한계시록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 전체가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설교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가치를 뒤집어엎는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는 대안적인 음성(alternative voice)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에 대하여 남아공의 신학자 요한 실리에(Johan Cilliers) 교수는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경은 낯설지만 구원하는 세상을 제시하며, 우리가 익숙하게 살아온 일차원적인 세상을 관통하여 놀랍게 만들고 자극하여 새로운 전망을 드러내서 새 세상으로 인도하며 복음적인 대안을 받아들여 살아내도록 이전 것을 벗겨내어 새로운 세상을 제시한다.” 성경이 바로 그러한 책이라면 우리가 설교한다는 것도 바로 그 대안적인 세계를 제시하여 교회를 대안적인 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로 세우는 작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이에 대한 실리에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하자. “설교한다는 것은 성경 본문을 제시하고 성경 본문이 회중에게 확증하는 분을 지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다스리는 새 세상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설교하다는 것은 본문이 지시하는 새로운 상상을 얻는 것이고, 그 세상이 우리의 세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며, 본문의 장엄한 안경을 통해서 청중이 이전에 놓쳤거나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성경 중에서도 이러한 대항문화적인 삶의 목표를 가장 선명하게 제시하는 책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특별히 대조의 방식으로 사용하여 신앙 공동체가 선택하지 말아야 할 삶과 마땅히 선택해야 해야 할 삶을 제시하고 있다. 그 대조가 바로 요한계시록의 엔딩 부분을 장식하는 의인화된 두 여인의 모습으로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창조로부터 시작된 하나님 말씀의 대미는 두 여인의 이야기로 귀결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한 여인에 대한 그림은 17-18장에 짐승과 결탁되어져 있는 음녀 바벨론이라고 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여인의 그림은 21-22장에 나오는 어린양이 신부인 새 예루살렘인 것이다. 대칭구조로 등장하는 두 여인의 대조를 통하여 우리가 마지막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시각화시키고 있는 것을 본다.

17-18장에 등장하는 음녀 바벨론은 그 당시의 로마를 상징하는 것으로 세상 도성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음녀 바벨론의 가치는 그녀에게 붙어 있는 수식어를 통하여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음녀 바벨론에 대한 수식어는 이다. 바벨론은 큼의 가치를 추구하는 도성이다. 바벨론을 음녀라는 창기의 메타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그녀가 끝없이 사람들을 미혹하는 존재임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 도성의 추구하는 가치와는 달리, 교회를 의인화하고 있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21:2,10)이라는 수식어로 설명되는 도성이다. 바벨론과는 차원이 다른 초월적이고 신앙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여인의 대칭 구조를 통하여 분명히 하게 되는 요한계시록의 의도와 목적은 음녀 바벨론의 정신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새 예루살렘의 가치를 구조하는 대안적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독려 하는데 있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다름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대조 사회로 살아가라는 부르심에 순종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한계시록의 설교의 목적과 지향점도 역시 바벨론의 정신이 호령하는 시대에 다른 세계(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하는 신앙공동체로 끝까지 인내로 싸워내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밝힌 것처럼, 이렇게 점차로 우리가 신앙공동체로 변화되어져 간다는 것을 그저 무언가를 행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담지하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세계에 초대된 자로서 세상 나라의 가치를 넘어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III. 신학자로서 설교자의 정체성과 삶을 변화시키는 요한계시록 설교의 중심 내용

1. 신학자로서 설교자의 정체성

유진 피터슨은 또 다른 요한의 정체성을 신학자로 규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라는 구절을 통하여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신학자의 안목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유추해 낸다. 사도 요한이 비록 유배지 밧모섬에서 납득하기 힘든 환난과 고통의 자리에 처해 있었지만, 그러한 상황을 세상적인 관점으로가 아니라 하늘의 관점으로 풀어내고 있다. “하나님(theos)의 말씀(logos)이 그를 거기에 있게 했고 그를 그런 인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죄수가 아닌 신학자의 소명을 받은 자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처한 곤경을 설명하기 위해 로마 정치를 분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증거에 지성을 발휘했다. 이것이 곧 신학자의 과업이다... 신학자는 하나님을 (감각이나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객체가 아닌 (모든 경험적 실체 위에 존재하는) 주체로서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이다. 또한 자신의 전 존재와 일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그분을 숙고하고 하나님을 얘기하는 일을 생의 과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요한계시록을 접하면 접할수록 사도 요한이 얼마나 성경에 대한 올바른 전망과 치밀한 논리, 그리고 튼튼한 신학적 묵상을 가지고 있는 신학자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는 분명 탁월한 신학자가 맞다. 그러나 그는 우리 시대의 일반 신학자와는 사뭇 다른 점이 있다. 그가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추론이나 서재에서 발견한 하나님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환난의 자리에서 만난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서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환난에서 만난 하나님을 제시해 주기에 유진 피터슨은 그를 매력적인 유형의 신학자라고 명명하고 있다. “하나님에 관한 그의 사상은 모두 박해 가운데 꽃피운 것이었다. “요한은...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바로 유배지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는 두 발로 뛰면서 생각하고 무릎을 꿇고서 기도하는 말하자면 오늘날 가장 이상적인 신학자의 전형인 셈이다. 역사를 훑어보면 신학자를 상아탑에 칩거하며 난해하고 장중한 책을 집필하는 데 몰두하는 인물로 여기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위대한 신학자들은 세상 한복판에서 왕성히 활동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관한 사유와 집필에 몰두한 이들이었다.” 사도 요한 역시 후자에 속하는 신학자이다. 사도 요한은 환난에서 참음(인내)를 만들어 낸 신학자이다. 누구나 넘어지는 환난의 자리에서 인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같은 시험에서도 요한은 인내라는 미덕을 만들어 내는 쾌거를 이룩하게 된다. 운동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것보다도 소중한 인간 승리의 자리로 나아간 것이다.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그를 환난에서 참음으로 나아가게 한 것일까? 그가 밧모라는 극심한 고통의 자리에서 견딜 수 있었던 원동력을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환난과 참음 그 사이에 있는 단어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나라이다. 사도 요한의 인내의 비결은 하나님 나라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꺾일 수 있어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어느 경우에도 절대로 중단되지 않고 확장되어져 가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영광스럽게 완성되어질 것이다. 지금 이 혼돈의 중간기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소망이 밧모에서 사도 요한을 지탱한 힘인 것이다. 물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스럽게 완성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지만 환난에서 참음을 만들어 가려면 그것 그 이상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매료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미래적 국면으로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만이 아니라, 능력과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신학자인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분명한 임재의 빛을 비춰줄 수 있는 사도 요한과 같은 신학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렇다면 신학자인 설교자의 정체성에 근거한 요한계시록의 핵심 설교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승리라고 감히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이에 대하여 보다 자세히 논의해 보기로 하겠다.

 

2. 요한계시록의 내용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승리

1) 요한계시록의 핵심주제인 영광스럽게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

이미 위에서 밝힌 것처럼, 요한계시록의 설교의 목적은 설교를 듣는 청중을 세상(나라)과는 질적으로 다른 성경의 가치와 정신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의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 이면에서 설교란 다름 아닌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로 사람을 초대하는 작업인 셈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는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 나라의 가치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님 나라이다. 설교를 통하여 우리는 사탄이 왕 노릇하는 세상 나라의 정신에 길들여진 사람들을 빼앗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하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 이면에서 요한계시록의 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정초되어야 하는 필요적인 이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에서 핵심적으로 선포해야 하는 내용은 영광스러운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에 의해서 에덴에서 시작되었지만 타락으로 인하여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러나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로 새롭게 건설되어지고 마침내 완성되어질 것이다. 제세니(Jethani)는 이러한 성경이 추구하는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거대담론을 동산”, “광야그리고 도시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동산을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동산은 질서, 아름다움, 그리고 풍요로움이라는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동산은 말 그대로 샬롬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샬롬의 세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만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 동산은 변하여 순 십간에 광야가 되고 만다. 하나님의 질서, 아름다움 그리고 풍요로움은 모두 깨어져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망가져 버린 그 샬롬의 세상을 버리시지 않는다. 만신창이가 된 세상을 다시 복구하시기 위해 일하신다. 다시금 잃어버린 질서, 아름다움 그리고 풍요로움을 회복하려고 하신다. 인간의 타락 이후, 나머지 구약 성경 전체의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창조주가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새로운 동산을 일구고 다시 한 번 창조 세계에 질서와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일으키는 계획을 시작하시는 이야기이다.”이를 위해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씨를 통한 구속의 길을 제시하신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그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펼쳐나가신다. 특히 출애굽 모티브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가장 선명한 그림이다.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절대로 타락한 인류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창조세계의 동산이야기와 반역으로 초래된 광야 이야기는 요한계시록에서 마침내 도시 이야기로 완성되어진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도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도시는 에덴동산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고작 에덴동산으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에덴의 특성으로 돌아가는 동시에 에덴의 가능성을 실현한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요한의 계시에서 하나님이 언제나 의도하셨던 세상을 발견 할 수 있다. 이 세계는 인류가 반역하여 죄가 창조 세계를 타락시키지 않았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이루었을 그 성숙한 세계다. 요한의 계시는 창세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리셋 버튼을 누르지 않으신다. 다른 고대 신화들과 달리 기독교의 이야기는 순환적이지 않다. 기독교의 이야기는 분명히 직선적이다. 이야기는 영광스럽고 놀라운 결말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간다.” 동일한 맥락에서 박성민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것은 단순히 에덴의 회복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는 살 자가 없는 이 세상과는 달리(33:20), 하나님의 얼굴을 목도하며 살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조하신 원래 의도가 성취된 모습으로 살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세세토록 하게 될 왕 노릇(통치)단순히 에덴의 회복을 뛰어넘는 것이며, 에덴에서의 원래 목적(예배)이 회복되는 것이며 (대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스림을 통해 우리가 제사장과 왕의 역할을 온전하게 감당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승리와 완성의 시기를 소망 가운데 응시하면서 광야의 시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는 단지 종점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성취되어야 할 목적, 곧 목표를 향하여나아가고 있기에, 보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광야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눈뜨고 더 나아가 그 나라에 매료될 때, 우리는 환난의 때에도 참음과 인내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반드시 이루실 그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 분의 나라의 영광스러운 승리와 완성을 막을 자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던지게 되는 질문은 두 가지이다. 첫째 질문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하여 이러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와 완성을 이루시는가 하는 것과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와 완성은 누가를 위한 것인가이다. 이에 대한 대답을 집약적으로 잘 제시해 주는 본문이 바로 계시록 17:14절일 것이다. “그들이 어린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이 구절을 통하여 얻게 되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어린양 예수님의 승리를 논하는 기독론을 근간으로 할 것이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교회의 승리를 논하는 교회론을 근간으로 할 것이다.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2) 어린양의 승리:

오늘 본문 17:14절은 극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장면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짐승을 중심으로 연대한 악의 무리들이 하나가 된다. 악으로 가득한 세상은 본질상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런데 하나가 된다. 어떻게 세상이 하나의 정신과 이념으로 뭉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그들이 연합한 이유는 오직 한가지이다. 어린양과 더불어 싸우기 위해서이다. 어린양과 싸울 때만 세상은 철저하게 하나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싸움의 승패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에게 성경은 어린양 예수님이 이길 것이라고 간단히 말해 준다. 에덴을 상실하고 광야를 맞이한 인생을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하는 도시로 초대하시는 그 사역이 누구를 통해 가능케 될 것인지를 분명히 말해 준다. 어린양께서 짐승의 세력을 이기심으로 이루신다. 어린양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므로 악의 세력을 제압하시고 하나님 구속의 경륜을 온전히 성취하실 것이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소개하고 있는 점이다. 계시록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표현이 바로 어린양이다.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생각나게 한다. 결국 요한계시록은 십자가 사역으로 승리하신 예수님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어린양의 승리를 보다 풍성히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계시록 5장의 장면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5장은 4장에 이어서 하늘 보좌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4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장엄함 앞에 숨죽이며 있던 사도 요한은 이제 5장에 이르러서는 크게 운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인봉된 책을 열자가 없어서이다. 요한은 크게 낙심하여 울고 있다. 그 때 장로 중의 한 사람이 사도 요한에게 말한다. “울지 말라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유다지파의 사자와 다윗의 뿌리로 소개된 그 분은 6절에 보니까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시다. 어린양은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사역을 연상케 한다. 그 어린양 예수를 통하여 인이 떼어지자 세상에 인-나팔-대접 재앙이 펼쳐지고 그 재앙들을 통한 심판이 이뤄진 후에 새 예루살렘(도시)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도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범한 인생이 망가뜨린 하나님의 작품을 다시 완성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특히 십자가를 통한 복음 사역으로 그 임무를 완수하신 것이다. 구원역사의 중심에는 어린양 예수님이 계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의 이미지를 십자가로만 좁게 국한지어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어린양은 곧 만주의 주이시자 만왕의 왕이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어린양은 죽임당하신 분만이 아니다. 승리하시고 영광스럽게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분이시다. 이러한 면에서 요한계시록은 복음서가 제시하는 어린양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복음서에서 제시하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돌아가는 모습이다. 이에 반해서 요한계시록의 어린양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이시다. 이면에서 김추성 교수는 요한계시록 기독론의 가장 큰 특징이 영화로우신 그리스도(Glorified Christ)’라고 주장한다.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계시다. 어린양을 전지전능한 강력한 왕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나님과 함께 천상의 보좌에 앉으신 영화로우신 어린양,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 승리하신 예수님이 요한계시록 기독론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린양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절정인 십자가만이 아니라 그 분의 승귀의 모습인 영광의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를 포괄하는 이중적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의 핵심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65권의 성경과 다른 차원을 언급하는 부록이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이다. 요한계시록을 흔히 세속적인 종말에 대한 이야기 이거나 지구촌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만 이해하게 될 때, 놓치는 위험은 나머지 65권의 성경과는 성격이 다른 책으로 다루게 되는 점이다. 성경의 전체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신약을 초림 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의미에서 이전의 성경 65권과는 다른 새로운 사상이나 개념이 아니다. 성경의 다른 책이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라면 요한계시록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메시지이다. 요한계시록을 그저 종말론적인 논의로만 풀어가는 것은 반쪽자리 진리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복음으로 읽고 설교되어져만 한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복음 기쁜 소식이다. 그렇다면 복음은 왜 기쁜 소식인가? 그것에 대한 답이 고전 15장에 나와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에 대하여, 골즈워드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라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그 분이 다시 오실 것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임을 역설하고 있다.”

물론 십자가와 부활로 대변되는 복음의 메시지가 이전의 다른 책에 비해서 빈도가 높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무게 비중만큼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이전의 책들과는 달리, 요한계시록만 불쑥 복음이외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일관성을 깨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해석을 시도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범하는 가장 커다란 위험은 바로 이 복음의 메시지가 상실된 채 행해지는 두려움을 자극하는 공상 만화와 같은 허무맹랑한 해석들이 난무하게 되는 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삶을 변화시키는 요한계시록 설교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핵심에는 어린양 예수님이 계신 것이다.

3)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승리: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승리와 완성이 어린양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답해야 할 때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승리와 완성의 최대 수혜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은 신앙공동체인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양과 교회의 밀접한 상호 연관성 가운데 있다. 어린양의 승리와 영광은 교회의 것이 된다. 어린양과 함께 고난도 받게 되지만 어린양과 함께 승리와 영광의 자리에서도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시 17:14절로 돌아가 보자. 짐승의 세력의 도발은 어린양에 의해서 제압당했다. 그렇다고 악의 세력들이 순순히 백기를 들지는 않는다. 짐승의 세력의 노리는 다음의 공격 대상은 계12장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신앙 공동체인 교회이다. 12장에서도 악의 세력의 공격은 먼저는 예수님에게로 다음으로 교회로 이동해 오는 것을 보게 된다. 먼저 용이라는 존재가 아이(예수님)를 공격하지만, 예수님께서 용의 공격으로부터 승리하신다. 성경은 용의 공격을 무력화시킨 예수님의 승리의 모습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5).” 예수님을 삼키지 못한 용은 이제 다음 타깃으로 여인(교회)을 공격하게 된다. 그 결과로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광야로 도망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6, 14). 결국 계시록은 사단의 세력이 우는 사자처럼 어린양과 교회를 향해 달려드는 공격과 그에 대한 응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투쟁은 실상은 원시 복음으로 알려진 창세기 315절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최종적인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시록의 중심 주제는 교회의 승리이다. 어린양의 승리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러기에 정확히 말하면 어린양의 이김을 통한 교회의 승리인 것이다. 신앙 공동체인 교회로 하여금 짐승의 세력을 이기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대장되시는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운명 공동체이다. 그 분의 이김이 우리의 이김의 기초가 된다. 교회가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승리할 만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로 이기는 것이다. 우리가 그 분에게 한편이기 때문에 그분의 승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자들이 이긴다는 말씀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승리가 그저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주어진다는 값싼 은혜를 조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값진 은혜의 길을 걸어갈 것을 촉구한다. 그것이 바로 계속되는 14절 마지막 구절에 있는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인 것이다. 주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 분 안에서 거룩해져야만 한다. 하나님 백성들의 변화의 모습 가운데 하나로 진실을 거명한다. 교회 공동체에게 진실이 중요한 이유는 계시록에서 악의 세력이 거짓과 과장 그리고 신성모독적인 말을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교회의 표지는 진실이다. 이처럼 은혜는 방종을 조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은혜 안에 있기에 더욱더 분투하게 하는 것이다. 은혜 안에서의 분투이다. 그것을 진실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것 하나로만 충분하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의 분투를 대표하는 표현이 진실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보다 확대된 분투의 길을 세 가지 신앙공동체가 모습으로 말해 보고자 한다. 이 세 가지가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선포해야 할 중요한 설교의 핵심 가치이자 내용인 것이다.

 

(1) 관점 공동체로 승리하라

인간이 직면하는 가장 보편적인 문제는 고난이다. 그런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인생의 필연성 가운데 있는 우리를 향하여 요한계시록은 우리의 현재적인 삶의 기대를 충족시키기보다는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을 제시해 준다. 오늘의 현실은 암담하지만, 반드시 내일은 다시 태양이 떠오를 것이고,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이길 것이다. 그것을 희망하면서 웃을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웃게 하는 책이 계시록이다. 환경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승리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승리자 예수그리스도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다 이루어주신다는 식의 문제 해결을 속 시원히 약속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는 책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7교회 모두를 향하여 공통적으로 권면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이기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우리가 전해야 가장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이다.이러한 이김을 위해서 요한계시록은 본격적인 계시가 시작되는 첫 마당에 하늘 보좌로 초대하고 있다. 하늘 전망대로 올라가라는 것이다. 거기서 새로운 시선, 새로운 시야를 가지고 현실 속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즉 새로운 봄(seeing)을 통하여 관점을 새롭게 하여 문제를 넘어서라는 권면을 주고 싶은 것이다.

 

(2) 저항공동체로 승리하라

요한계시록에서 세상의 도전 앞에 서 있는 교회를 시대정신을 거절하는 저항 공동체로 묘사하고 있다. 현재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의 골자는 저항하는 공동체로 승리한다는 것이다. 만일 도미티안이 자신을 경배하도록 강요하는 황제 숭배의 상황이 계시록의 역사적인 배경이라면, 현재를 재조정시킨다는 것은 좌절과 두려움에 빠져 있는 교회로 하여금 다시금 악의 도전 앞에서 저항하게 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저항이라는 단어를 결단이라는 단어로 대치해도 무방하다. 스탠리 샌더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로마제국에서 삶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스토리들에 대한 강력한 대안을 제공하는책이다. 구약성경에서 뿐만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 다양한 형태로 빈번히 등장하는 전쟁 신화(combat myth)를 중심으로 계시록은 어린양과 정사와 권세 사이의 싸움을 큰 화폭에 그리고 있다. 어린양의 길과 짐승과 바벨론의 길에 대한 철저한 대조가 계시록 환상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들이 쫓아가야 하는 어린양의 길을 방해하는 정사와 권세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이 직면한 저항의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다양한 정사와 권세에 대한 캠벨의 설명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제국이 우세하게 가지고 있는 이러한 권세는 이 세상을 통치하려는 초인간적인 세력으로, 궁극적으로는 인간들의 헌신과 희생을 요구한다. 물질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이 권세들은 사회조직과 이데올로기, 나라들, 경제체제, 그리고 다른 많은 실체 가운데 구체화 된다. 스스로를 신성한 대리자로 가장하는 이러한 권세들은 비록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의도들과는 정반대에 위치하며 실제로 삶이라기보다는 죽음의 전달자들이다. 혼돈과 압제의 중의성을 가진 짐승이나 짐승과 같은 힘이나 영으로 묘사되는 사탄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권세들은 세상을 사정없이 파괴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죽음으로 위협한다. 미혹하는 자의 형상으로도 비쳐지는 이러한 세력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복종하도록 유혹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박해나 육체적인 죽음의 위협이라는 방법을 취하지 않고도 사람들의 영을 사로잡기도 한다.”

이러한 정사와 권세들로 사람들을 위협하는 세상 제국은 구속적 폭력(redemptive violence)의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해야 할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하여 역설하게 된다. 구속적 폭력이란 구속이라는 거룩한 명목을 위하여 폭력의 방식을 사용할 것을 용인하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가 얼마나 이러한 거짓된 정당성이 만연된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를 쉽게 확인하게 된다. 요한은 바로 이러한 어두운 영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 한 복판에서 어린양의 방식을 따라서 살아갈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저항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과 함께 요한이 또한 분명히 강조하는 바는 엄청난 악의 세력 앞에서 신자들은 홀로 흩어져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함께 어깨동무하며 정사와 권세에 대항 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면에서 요한계시록을 개인을 위한 권면으로가 아니라, 신앙공동체를 전체를 위한 메시지로 보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을 교회 공동체 중심으로 읽고 설교해야 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심리 치료적 메시지나 현실적인 필요에 국한 된 문제를 넘어서는 보다 커다란 이슈에 정초시켜야 할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개인적인 문제와 필요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더 커다란 목표, 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이 정세와 권세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게 독려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요한계시록에 대한 우리의 설교 내용도 정사와 권세로 대변되는 로마의 정권에 저항하면서 현실적 어려움을 인내로서 견뎌낼 수 있는 공동체를 많이 언급하는 것이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설교는 무엇보다도 저항 공동체로 어떻게 서야 하는지를 중심내용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3) 예배 공동체로 승리하라

신앙공동체인 교회에 부여된 최대의 저항 행위는 무력적인 시위 같은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께만 온전한 경배를 드리는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예배에 대한 독려는 곳곳에 있는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돌리는 찬양의 메아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드리는 공적인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한다. 뿐만 아니라, 계시록에서 예배는 공적인 예배를 넘어서 삶의 예배를 촉구한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계 184절에 있는 것처럼, 주의 백성들이 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거기서 걸어 나오는 것이다. 우리들이 바벨론 안에 들어가 살아야 하지만 바벨론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늘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사는 것이 우리가 드릴 진정한 삶의 예배인 것이다.

그동안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예배의 주제를 설교하는 강단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요한계시록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핵심주제가 예배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김추성은 마리안 톰슨을 인용하여 요한계시록의 핵심 주제가 예배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면 요한계시록이 신약의 어떤 책보다도 찬양과 경배가 풍성한 책이라는 것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안 톰슨(Marianne M. Thompson)은 요한계시록에서 경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신약 성경 중에서 요한계시록만큼 경배라는 주제를 뚜렷이 부각하는 책도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어떤 책보다 경배에 관련된 용어와 이미지를 풍성하게 제공하고 있으며, 경배라는 주제는 요한계시록 전체의 목적과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보인다.” 예배의 정신과 감격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저항의 의미와 문맥으로 예배를 설교해야 할 시점이다.

 

VI. 시인으로서 설교자의 정체성과 삶을 변화시키는 요한계시록 설교의 형식

1. 시인으로서 설교자의 정체성

마지막 세 번째로 유진 피터슨이 제시하는 요한의 정체성은 시인이다. 시인의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설교학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신설교학“(new homiletic)이 등장하게 되면서 부터일 것이다. 크레독의 귀납적 설교, 유진 로우리의 내러티브 설교, 버트릭의 현상학적인 설교 그리고 그 외의 창조적이고 실험적인 방식의 설교 방식이 대두되면서, 설교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설교 형식이나 시적이고 상상력이 풍성한 언어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시인 혹은 이야기꾼으로의 설교자의 이미지는 성경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성경 자체가 이야기와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책이다. 원래 성경은 시인의 상상력이 있어야만 읽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쓰여 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를 따라 기록되어져 있기에 그 어떤 다른 성경보다도 사도 요한을 시인으로 이해하게 될 때 바르게 해석될 수 있는 책이다. 사도 요한이 시인으로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요한계시록은 엉뚱한 방향으로 읽혀지고 적용되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강단에서 설교자들이 시인으로서 요한의 정체성을 간과하여 요한계시록의 묵시문학적인 상징성을 놓치고, 그저 문자주의적인 해석과 설교를 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지 모른다. 문자에 충실한 해석을 하는 것은 귀하지만, 문자주의적인 해석은 요한계시록의 장르에 대한 무지로 인한 소치인 것이다. 묵시는 내러티브로 구성된 문학 형식으로 상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상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요한계시록이 어떤 정보(information)를 제공하는 것 보다는 상상력을 자극시켜 무엇인가를 보게 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역할인 것이다. “시인이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무엇인가를 설명하거나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다. 시인은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을 뜻한다. 시는 객관적인 해설의 언어가 아니라 상상의 언어다. 그것은 읽는 이의 참여를 초대하는 형식으로 실제에 대한 이미지를 만든다. 한 편의 시를 읽고 난 후 우리는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많은 체험을 얻게 된다. 그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그 일에 몰입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시인이자 신학자인 사람에 의해 쓰였다면, 요한계시록을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찾기 위한 연감이나 이미 일어난 일을 기록한 연대기처럼 읽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의 마지막 책을 시인의 정서와 감정으로 기록하게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성경에 관한 지식은 그동안 이미 제공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충분하다. 정말 필요한 것은 65권을 통해 이미 제공된 지식을 마음의 화랑에 그려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세계를 다시 느끼고 경험케 하여 잠자는 심령을 깨우는 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구되어진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시인으로써 요한계시록을 쓰게 하심으로써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있는 우리를 흔들어 깨워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도록 하며, 우리 눈을 열어 불타는 떨기나무와 불 병거를 보게 하며, 우리 귀를 열어 강철같이 견고한 그리스도의 약속과 명령을 듣게 하며, 복음에 대해 지겨워하던 마음을 말끔히 씻어 주며, 우리 고개를 들게 하고, 우리 가슴을 활짝 넓혀 줄 것이다.” 이렇게 시인으로서의 요한의 정체성은 요한계시록을 설교해야 하는 설교자들에게 어떤 형식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매우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계속해서 시인인 설교자 요한에 의해 기록된 요한계시록의 저술 방식이 설교의 형식을 고려하는데 어떤 설교학적인 함의를 갖는지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2. 삶을 변화시키는 요한계시록 설교의 형식

요한계시록의 저술 방식을 조사해 보아야 하는 이유는 사도 요한이 어떻게 공동체를 설득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파악하게 될 때, 삶의 변화시키는 설교 형식을 고려해 볼 수 있게 된다. 사도 요한이 위협과 유혹 속에 있었던 초대 교회 신앙공동체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메시지(내용)를 어떤 그릇에 담았는지를 논할 때 주목할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형태의 사고 -즉 명제적 사고와 내러티브적 사고- 가운데 후자를 선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명제적 사고는 논리적, 분석적, 추상적 개념을 가지고 진리를 전달하는데 반해서, 내러티브적 사고는 직관적, 구체적, 상상적인 접근을 통하여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요한계시록 가운데 끝없이 등장하는 이미지, 상징, 환상, 비유, 묵시적 묘사들은 이 책이 얼마나 철저하게 내러티브적 사고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한마디로 요한계시록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이렇게 정사와 권세를 항거하는 하나님 나라의 정신에 매료된 신앙공동체를 세우기를 추구하면서, 외관상으로 더 힘 있는 방식으로 보이는 명제적 진술을 통한 직접적 선포의 방식에 호소하기 보다는 공동체의 상상력에 주의를 상기시키는 이유는 공동체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과 스탠리 하우어바스(Stanley Hauerwas)가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요한은 우리들이 단지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대안적 세계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환상과 이상을 통하여 자신의 글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극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와 비유를 통해, 요한은 교회가 두려움과 영적 마비상태에서 깨어나 예수님의 스토리라는 빛 가운데서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에서 살아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공동체로 하여금 대안적 세계를 다시 상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요한이 사용하고 있는 방식은 한편으로는 거짓된 세계를 폭로하는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계의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먼저 요한은 정사와 권세의 거짓된 가면을 벗기기 위해서 실체를 규명하고 있다. 이 세상 제국의 실체가 다름 아닌 압제와 폭력, 그리고 죽음의 대리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이라는 큰 화면 안에 짐승과 바벨론의 모습을 허상의 실체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죽음의 세력에 대하여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력하게 저항해야 할 것을 간접적으로 촉구하는 방식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미 살펴본 17장에서 그 당시 제국의 중심이었던 로마를 상징하는 바벨론을 단순히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제공해 주는 도성이기 보다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헤어 나올 수 없게 죽음의 늪지대로 빠뜨리는 음녀로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음녀라는 창기 메타포를 통하여 바벨론의 속성이 사람을 미혹하고 꾀이고 죽이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18장에 이르면 이 바벨론의 망함 앞에서 바벨론과 결탁되었던 모든 세력들이 통곡하는 애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세상의 도성이 맞이하게 될 궁극적 운명을 폭로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폭로는 교회 공동체에게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 이상의 예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악을 폭로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먼저 악의 세계의 실상을 폭로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더 나아가 대안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렇게 대안적 세계를 요한계시록이라는 큰 화면 안에 희망적으로 그려주는 것을 통하여 신앙공동체에 소망을 제시하고 그들로 하여금 더욱더 강력하게 세상 나라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주는 방식으로 글이 전개되고 있다. 만약 요한계시록이 세상의 제국은 반드시 망한다는 사실만을 독자들에게 상상하게 한다면, 반쪽짜리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요한계시록은 이 거짓되고 허상의 실체들로 가득 찬 세계 가운데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평화로운 통치의 세계를 대안적으로 그려볼 수 있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 세상 제국의 모습을 드러내는 짐승과 바벨론의 실체와 반대되는 대안적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그림은 새 예루살렘의 모습일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정결함을 표지로 가지고 있는 어린양의 신부이다.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완성되어진다. 이러한 요한계시록의 극적이고 대조적인 환상은 그 시대의 교회로 하여금 자신들의 싸움이 승리를 얻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이미 승리를 얻은 자로서의 싸움이라는 점을 더욱 더 확신하게 만든다. 이렇게 두 세계의 길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짓된 실체에 대한 순응과 충성의 길을 거절하고 참된 왕이신 하나님에게만 거룩한 입맞춤으로 나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요한계시록이 사용하는 저술 방식에 대한 논의가 갖는 설교적 함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교회 공동체를 저항하도록 인도했다는 점을 존중하게 될 때, 우리의 설교는 단순한 문자 주의적 해석과 적용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설교는 계시록의 많은 이미지와 상징적인 장면들을 두 대조되는 세계의 실체와 두 대조되는 삶의 길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조심스럽게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서 계시록의 숫자 가운데 하나인 144,000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아주 이상한 쪽으로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총수가 어느 이단들의 주장처럼 문자적으로 144,000밖에 되지 않는다면 우리들을 그 숫자에 들어가기 위해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기울어야만 하겠는가?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도 구원받은 총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 주장인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또 한 가지 요한계시록이 사용하는 저술방식에 대한 논의가 갖는 설교적 함의는 요한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계시록을 기록한 것을 존중하여, 계시록에서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 내용과 그 내용을 싸고 있는 형식에 동등한 무게를 둘 수 있는 설교가 요구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토마스 롱의 표현처럼 내용과 형식, 두 가지는 구분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분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쓰여졌는지에 대한 물음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위한 장식 정도로 취급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읽거나 풍성히 읽어가지 못한 이유들 중에 하나이다. 이것을 토마스 롱(Thomas Long)은 우리 설교자들이 범하는 가장 큰 실수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본문의 문학적 차원이 겨우 장식품 밖에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본문은 아이디어들을 묶어 놓은 보따리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전달 기관이다... 그러하지만, 만약 내용을 의미라는 유사어로 쓸 수 있다고 하면, 형식은 내용의 급소(a vital part)로 보아야 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아마, 이 두 가지를 합하여서 내용의 형식“ (“form of the content")이라고 함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토마스 롱의 주장이 맞는다면, 계시록이 형식에 있어서 상징적인 면에 치중하여 글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지나친 명제적이고, 교리적이며, 일방적 선포 방식으로 설교하기보다, 감성적이고 상상적이며 그리고 쌍방 참여적인 설교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상에서 논의한 시인으로 설교자 요한의 저술 양식 혹은 장르를 살리기 위해서 필자가 제시하고 싶은 설교적인 형식은 이미지 충돌의 구조로 전개되는 설교이다. 우리들이 마땅히 저항해야 하는 거짓된 이미지를 제시하고 이것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으로 두 세계가 충돌시켜 우리 시대의 청중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제 두 세계의 이미지를 충돌시키는 설교 개요를 간략히 제시해 보고자 한다.

 

성경 본문: 요한계시록 11:3-14/ 설교 제목: 능력으로

*설교의 Main Idea: 권력으로의 능력이 아니 권위(사랑)로서의 능력으로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자.

*설교의 구성과 흐름: 기본적으로 권위주의 형태의 세속적인 능력의 이미지를 폭로하는 것에서부터 성경적인 권위(사랑)의 능력으로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이어서 우리가 추구해야 가야할 능력의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동해 가는 설교를 구성하고자 한다.

*설교의 아웃라인:

I. 서론:

A.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능력의 필요성

B. 권력의 능력과 권위로서의 능력에 대한 정의와 차이점 제시

-권력으로의 능력: 상대를 제압하는 강압적인 힘

-권위로의 능력: 상대를 자원하여 움직이게 하는 힘 (사랑으로 인한 희생이 권위가 생김)

II. 세속적인 능력의 이미지: 권력의 방식

A. 다양한 세속적인 권력의 그림들

B. 갑의 횡포로 인한 을의 아픔들에 대한 실례들

C. 전환문: 이것은 오늘 성경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두 증인의 그림과는 차이가 있다. 두 증인으로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능력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III. 성경적인 능력의 이미지: 권위(사랑)의 방식

A. 본문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 단어(주제)로서의 능력

B. 능력으로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두 증인

C. 능력과 함께 죽음의 길을 걸음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과 오버랩)

D. 증인의 능력의 실체로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힘으로 능력-권력이 아닌 사랑의 능력

IV. 신앙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능력의 길-결론을 대신하여

A. 능력 없이는 사역을 할 수 없기에 능력을 구해야 함

B. 문제는 세상적인 능력이 아니라, 진정한 능력을 소유해야 함

C. 자기희생의 십자가와 사랑의 능력으로 증인의 길을 걸어가야 함.

D. 걸인의 친구로 살았던 마더 테레사의 능력의 삶의 이야기로 마무리

V. 결론

모든 성경은 신앙 공동체인 신자들의 삶의 변화를 위해 기록되어졌다. 그렇다면 성경의 마지막 66번째 책인 요한계시록 역시 삶의 변화를 위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건전한 신학을 표방하는 정통교회일수록 요한계시록은 침묵의 책으로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것을 본다. 불건전한 종말론과 기독교 이단들의 도전으로 요한계시록 설교도 고작(?) 좁은 영역에 국한되는 변론적인 설교가 대부분이다. 신앙공동체의 삶의 변화를 위해 설교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러한 작금의 우리의 모습에 대안점을 제시하기 위해서 본 논문은 삶을 변화시키는 요한계시록 설교의 방향성을 목회자, 신학자, 그리고 시인으로의 설교자의 정체성과 연관 지어 논의해 보았다. 목회자는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의 목적 혹은 목표와 연결해서, 신학자는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의 내용과 연결해서 그리고 마지막을 시인을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의 방식과 연결해서 설명하였다.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회중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설교자는 목회자, 신학자,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설교의 목적, 설교의 내용 그리고 설교의 형식이 동시적으로 고려될 때,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하여 바벨론 같은 어두운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정신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교회 안에 그 수가 더해질 것이다. 이제 설교자들은 더 이상 요한계시록을 처녀림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이 그 어떤 다른 성경보다도 친숙하고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책이 되게 해야 한다. 또한 요한계시록을 특별한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일반 성도들이 수시로 입산할 수 있는 책이 되도록 설교하고 가르치고 적용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 땅에 설교자들을 통하여 보다 빈번히 요한계시록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의 복음이 힘 있게 선포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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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n Investigation of Life-Changing Sermon on the Book of Revelation: Focused on the Identity of the Preacher as a Pastor, Theologian, and Poet.

 

Lee, Woo Je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suggest the way of life-changing sermon on the book of revelation especially focused on the identity of the preacher as a pastor, theologian, and poet. For this, I am greatly indebted to Eugene H. Peterson for suggesting an insight to make understand John as the preacher. According to the premise of Eugene H. Peterson’s book, “Reversed Thunder: The Revelation of John and the Praying Imagination”, the preacher, John wrote Revelation in the view and mind of a pastor, theologian, and poet. His cental statement is to see revelation as “the work of pastor, poet, and theologian achieved a synthesis in the act of worship.”

In the light of Eugene Peterson’ insight. I tries to connect it with the direction for life-changing preaching of the book of Revelation. When a preacher is understood as a pastor, the intention of writing(purpose) of Revelation for life-changing sermon can appropriately be discussed. Next, when a preacher is understood as a theologian, the contents (as the victory of the kingdom of God) of Revelation to be proclaimed for life-changing sermon can be mentioned. Finally, when a preacher is understood as a poet, it can be discussed that we should choose any sermon form for life-changing sermon based on the genre of Revelation.

 

Key Words: Preaching, Revelation, Community, Life-Changing Sermon, Kingdom of God

 

한글 초록

본 논문의 목적은 목회자, 신학자, 그리고 시인으로 설교자 요한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요한계시록 설교의 길을 모색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 (IVP)라는 유진 피터슨의 책에서 요한을 설교자로 이해하는 그의 통찰력에 크게 빚지고 있다. 유진 피터슨의 전제에 따르면,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목사와 신학자 그리고 시인의 관점과 마인드로 글을 쓰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의 핵심적인 강조점이 드러나는 진술은 요한계시록을 예배의 행위 안에서 통합이 이뤄지는 목사, 시인, 그리고 신학자의 사역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진피터슨이 제시하는 통찰력과 함께, 필자는 거기서 얻은 착상을 발전시켜 삶을 변화시키는 요한계시록 설교의 방향성을 연결 지어 보고자 한다. 설교자가 목회자로서 이해되어질 때,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위한 요한계시록의 저술의도(목적) 적절히 논의 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설교자가 신학자로 이해되어질 때,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로서의 요한계시록의 설교를 통해 선포되어져야 하는 내용들이 언급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교자가 시인으로 이해되어질 때, 우리는 요한계시록 장르에 기초한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위해 어떤 설교 형식을 선택해야만 하는지를 논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주제어: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