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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고

예수님 실종 사건

11:41~53

예수님 실종 사건

 

 

41.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45.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47.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할렐루야~ 나사로를 살리신 본문 말씀은 듣고 읽고 듣고 읽어서 여러분 모두 잘 아시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기에 읽고 듣고 전하고 또 전해도 늘 새롭게 은혜가 되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나사로가 죽음에 이르는 데에 주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고, 나사로가 살아난 후에는 오히려 대제사장들이 그를 죽이려는 모의를 했고, 이에 더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는 거대한 계획으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이는 결국 유대 민족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는 일로 귀결됩니다.

 

이제 나사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를 오늘 본문 111절에서는 어떤 병자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은 이를 공히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a man named Lazarus was sick” “a certain man was sick” 이는 ‘(나사로라고 불리는) 어떤 사람이 병들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 따르면 나사로는 평소에 지병이 있는 사람이란 느낌이 들고, 영어 성경에 의하면 지병까진 아니고 갑자기 내지는 상당한 기간 몸이 아픈 사람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3절과 6절에 의하면 나사로는 갑자기 병이 난 것으로 보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집을 자주 들르셨을 텐데 만일 그가 지병이 있었다면, 4(“예수께서 들으시고”)6절처럼 표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가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은 오라버니 즉 오빠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개역개정 성경이 번역상 일관성이 없는 점입니다. 개역한글은 오라비라고 번역했으나, 개역개정은 2, 21, 32절에서는 오라버니, 19, 23절에서는 오라비로 했습니다. 통상 오라비는 오라버니의 낮춤말이거나 남동생을 지칭합니다. 만일 낮춤말이라면 21절과 32절을 오라비로 번역해야 더 좋았을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전부 “my brothe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냥 남자 형제를 지칭하므로 오빠인지 남동생인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성경 표현상 항상 연장자 순으로 기록하지는 않습니다만(1), 5절을 보면 나사로가 막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배제할 순 없습니다. 마르다 나사로 마리아 순서일 수도 있구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는 문제를 왜 따지느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마르다와 마리아가 느끼는 슬픔의 크기 때문입니다(33). 편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자 형제들의 입장에서 오빠의 죽음과 남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크기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볼 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캣치할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큰 은혜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해당 성경 말씀이 쓰여질 당시의 여러 배경이나 상황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나사로의 죽음과 관련된 특별한 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방금 언급한 대로 나사로가 아프게 되었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나사로가 병이 났다는 즉 아프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으신 장소는 공교롭게도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가 아니라, 다른 베다니 즉 요단강 동편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1:28)으로 추정됩니다(10:40).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의미는, 나사로가 죽지 않는다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주님께 소식을 전한 후, 나사로는 금방 죽었습니다. 죽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 할렐루야!

 

주님께서는 요단강과 염해가 만나는 지점의 요단강변 동쪽에 있던 베다니에,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도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습니다(6). 그런데 5~7절에는 참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 나옵니다. 5~7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유대로 가자고 하신 건 아마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8). 왜냐하면 수전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주님께서,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는 봉변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10:31).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한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소위 예수님 실종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소식을 들으시고 머무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요단 건너편 베다니에서 이틀을 더 계시다가, 나사로가 살던 베다니를 살짝 옆으로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셨다가 며칠 정도 체류하시고 나사로에게 가신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계시던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고 나사로에게 바로 가신 경우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고 하셨지만, 성경 문맥상으로는 안 가신 것으로 보는 게 맞는 듯 보입니다. 유대로 가자는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브레이크를 걸었고(8), 주님께서는 머무시던 곳에서 나사로에게 가시려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11). 그리고 베다니로 가셨는데, 나사로가 죽은 지는 이미 나흘이나 됐습니다(17).

 

주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에 그가 바로 죽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요단 동편 베다니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예루살렘에 다시 들르시고, 나사로에게 가셨을 때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됐기 때문에, 시간적 공백이 큽니다. 나사로가 조금 더 늦게 죽었다고 가정하면, 예수님 실종 사건은 더 길어질 것입니다.

 

하물며 요단 동편 베다니에서 서편 베다니로 바로 가셨다고 본다면, 시간적 공백이 더 커지게 됩니다두 베다니 사이의 거리는 약 50km, 도보로 10시간 내외로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어쨌든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잠들 때까지 시간을 끄셨습니다(11). 어디서 시간을 지체하셨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면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하고,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0%도 되지 않는 완전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때 나사로에게 가셨습니다. 할렐루야!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도록 늦게 가신 이유를 주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15절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믿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실종 사건은 결국 제자들의 믿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할렐루야! 나사로가 죽어 시신이 썩을 때까지 주님께서 시간을 끄신 이유가 무엇이라구요? 바로 제자들과 마르다 마리아와 우리들 모두가 믿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25~26절 말씀을 합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41~42절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나사로가 살아난 기적을 보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45).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공회를 모아서 많은 표적을 행하는 예수를 어찌할꼬 하면서(47), 결국은 죽일 모의를 하게 되었습니다(53).

 

그런데 48절은 유대 지도자들의 생각을 엿보게 해줍니다. 48절을 합독하시겠습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대제사장을 비롯한 공회에 모인 유대 지도자들에게 무슨 생각이 떠올랐을까요?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메시아입니다. 예수라는 자가 죽은 자까지 살릴 정도라면,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메시아로 따를 것이고, 정치 세력화하여 독립을 선언하게 되면, 즉각 로마 당국의 반란 진압과 직접 통치를 받게 될 거라는 생각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정치적 메시아로 오시지도 않으셨지만(1:6), 이 유대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자기 민족을 생각하는 척하면서(48), 사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로마가 식민 통치를 하면서 종교의 자유를 주었는데, 로마 정부가 본토처럼 직접 통치를 하게 되면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일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비밀입니다.

 

힘없고 권력 없는 백성들은 이제나 저제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데, 유대 지도자들 특히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50).

 

악인의 입을 통해 선포되었지만, 이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질 일이었습니다. 51~52절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제 무덤에서 나온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게 되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게 되었습니다(12:10~11). 평소에 웬만큼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면, 이게 웬일인가 하면서 그런 일과 그 일을 하신 예수님에게 관심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악한 자들인지 알게 해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사로가 죽기 전에 그에게 가지 않으신 것은, 더 큰 일을 보여주시고 믿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신 것도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음을 모든 자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주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주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유는 한 마디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표적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과 그 의미를 생각하고 매일 승리하며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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