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복, 팔복
마5:1~12
하늘 복, 팔복
1.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복을 받아 누리길 원할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은 재물 복, 명예 복, 건강 복, 장수 복 등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릴 때는 밥그릇 국그릇에조차 ‘복’자나 ‘수’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복’자를 거꾸로 새겨놓기도 하는데, 이는 복이 쏟아져 들어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운데 잘~ 되고 장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런 복을 받아 누리는 것도 우리의 특권입니다.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겔36:28)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신4:40)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신6:1~3).
그런데 신약시대로 오면서 복에 대한 개념은 많이 바뀌게 됩니다. 이 복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복입니다. 그러나 그 복을 받기 위하여 반드시 따라오는 게 있으니 그것은 ’고난‘이라는 동반자인데, 고난은 복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주님께서도 고난이 복이라고 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할렐루야!
신약 말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복의 개념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밑줄 친 부분이 복! 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살후1:5)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팔복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팔복에 대한 말씀이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즉 주님께서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시고 말씀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팔복에 대한 말씀은 처음의 복과 맨 마지막의 복이 나머지 복을 감싸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3절과 10절을 합독하시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심령이 가난한 자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공히 누리는 복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천국을 소유하는 복입니다. 할렐루야!
복 중에 최고의 복은 천국에 들어가는 복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4~9절까지의 6가지 복도, 땅에 속한 (자들이 누리는) 복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들이 누리는)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밥을 굶거나 힘든 고행을 해서 육신이 고통을 겪으면 심령(영혼)이 가난해질까요? 예를 들면 중세시대 수도사들의 삶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들은 하루에 한 끼만 먹거나 하면서 힘든 노동을 하고, 때때로 밤을 새우며 기도를 했습니다. 혹시라도 로마에 가게 되면, 성베드로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곤 했습니다. 그렇게 한 그들의 영혼이 가난해졌을까요?
주님께서 가난한 영혼이 있다고 하셨으니, 반대로 부요한 영혼도 있을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없거나 부족한 것이므로, 영혼을 비우면 될까요? 그렇다면 영혼을 비운다는 의미는 어떤 것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그게 가능할까요? 복잡하고 죄 많은 세상을 떠나 단절된 삶을 살면 될까요? 욕심과 탐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되나요?
심지어 기도를 많이 하면 될까요?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무언가 하나님께 구하는 게 많아서 기도를 많이 한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가난해질까요, 부해질까요? 기도를 하지 말라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먼저 영혼이 가난해진 후에 기도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성령님께 여쭙고 또 여쭈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답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비우는 게 아니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할렐루야!
우리의 영혼이 가난해지려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으로만 채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가난해질 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능력으로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심령을 비울 수도 없지만, 설령 비운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의 심령(영혼)을 가득 채우면 가난하게 되지만, 역설적으로 주님이 주시는 풍성함으로 천국을 누리는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여덟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세상의 의가 아닙니다. 사기꾼에게도 의가 있습니다. 속여 빼앗는 것이 사기꾼의 의입니다. 나의 의는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시대에 들어섰음을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라고 하셨는데, 11절에서는 “나로 말미암아”라고 하십니다. 결국 ’의=예수 그리스도‘라고 친히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1~12절을 합독하겠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둘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절)
애통은 영어로 ’mourn’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슬퍼하는 게 애통입니다. 그토록 처절한 마음으로 우는 겁니다.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애통해야 합니까?
나와 나의 자녀를 위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 불쌍한 자들을 위해 애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19:41).
그래서 저는 웃으시는 예수님을 그린 그림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언제 활짝 웃으셨나요? 성경에 그런 기록이 나옵니까?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그런 그림 걸기 힘들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주님 말씀대로 산 모습을 보시면 기뻐하시며 활짝 웃으시겠지만, 그건 재림하신 주님의 모습에서 뵐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울어야 나중에 웃게 됩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6:21b).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영혼에 부어지지 않으면 애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나에게 부어주시도록 간구합시다. 할렐루야!
셋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절)
온유한 자는 ‘the meek’ ‘the gentle’ 등으로 번역됩니다. 유순하고 착한 사람이 땅을 기업(유산)으로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성격이 온유하고 상냥한 사람이 성공하여 부를 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세상적인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유하다는 것은 말씀 앞에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입니다. 여기 착하고 젠틀하게 생긴 불신자가 있습니다. 그가 복음 앞에 완고하다면 그는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탐꾼 10명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들어가지) 못한 역사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을 향해 ‘목이 곧은’ 즉 완고한(=온유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절)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과 만나셨을 때, 제자들에게 진정한 양식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1~34)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목마름과 허기짐이 있을 때 진정한 양식으로 배부르게 될 줄 믿습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채우려 해도 결코 채울 수 없을 것입니다. 돈(money)으로 채워질까요? 돈은 갈증 난 사람에게 주는 바닷물 같은 것입니다. 돈돈돈 하다가 돈미남(돈에 미친 남자), 돈미녀가 됩니다.
요4:34를 이렇게 바꿔서 우리에게 적용해보겠습니다. ‘우리의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the merciful”로 번역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긍휼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멀리 있는 굶주린 아프리카 아이들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주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눈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 믿는 자들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요일3:17).
왜 가정이나 교회나 어디서든지 다툼이 있고 미움이 있을까요?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면 미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만이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받게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the pure in heart”로, 마음이 순결하고 순수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청결함이 있어야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우리의 더러운 마음과 죄악이 하나님을 뵐 수 없게 만듭니다.
거울이 더러우면 제대로 사물을 볼 수 없습니다. 깨끗한 거울이라야 그 앞에 선 자를 제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청결한 마음은 깨끗한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더러운 그 무엇이 가로막고 있다면 하나님을 뵐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뵌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요1:18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청결한 마음으로 신앙 여정을 갈 때,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 주님으로 인해 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일곱째,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the peacemaker”입니다. 오래 전 성지순례를 갔을 때, 이스라엘 최남단에 있는 에일랏 국경검문소를 통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입국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테러 때문에 입국 절차가 까다롭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제가 여권을 제시하면서 ‘샬롬’ 하면서 인사를 건냈더니, 무사 통과가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무뚝뚝하게 검사대 앞에 섰었는데, 그는 가방을 탈탈 털렸던 기억이 납니다.
피스메이커가 바로 샬롬메이커입니다. 샬롬은 트러블을 아예 일으키지 않는 능력일 뿐만 아니라 싸움을 중단시키는 힘입니다. 믿는 자들 중에도 피스메이커는 고사하고 싸움메이커도 많습니다.
창피한 얘기지만 목회자 중에도 싸움메이커가 있습니다. 노회고 어디고 그 사람이 나타나면 반드시 싸움이 납니다. 기막힌 능력입니다. 학교나 직장이나 어디에서나 나를 힘들게 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들을 향해 샬롬을 선포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샬롬메이커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주신 말씀은 인간의 도리나 도덕,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인생철학을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팔복은 하늘에 속한 자가 받는(받아야 할) 복입니다. 비록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누려야 할 하늘의 복입니다.
이 모든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길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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