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몬1:1~10
끝까지
1.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4.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7.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8.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우리는 신앙 여정이나 인생 여정을 가면서, 어떤 큰 일을 행하거나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는 하지만, 늘 같은 예배와 봉사와 헌신으로 인해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게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나 생각을 깨뜨려 주시는 말씀이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서는 짧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어떤 거대한 교훈이나 사건이 들어있지도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잠잠히 빌레몬에게 당부하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바울이 한 당부도 대단한 게 없습니다. 그저 오네시모라는 종을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받아주라는 게 다입니다.
한 가지 더 있다면 바울이 자신을 위한 숙소를 마련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22절). 바울이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 정작 로마 감옥에 있었는데, 빌레몬과 여러 성도들의 기도로 (아마도 골로새를) 방문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던 시대도 아니고, 전쟁이 나서 피란민 교회에 출석해야 하는 비상한 상황도 아닙니다. 에배에 모이지 못하게 한 코로나 시기를 거쳤고, 경제적으로도 어렵지만 그래도 우리의 신앙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평온한 시대입니다. 이렇게 신앙적으로 평온한 시대이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끈질긴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어려움과 환난에 처하면 그러지 말라고 해도 주님을 찾고 매달리고 더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힘든 일도 없고 고난도 없으면 열심을 내지 못하는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평온한 시기에 믿음을 업그레이드 시키기가 그래서 더 어려운 법이지요.
이하 빌레몬서를 통해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태도나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빌레몬서를 통해 알게 되는 교회와 성도의 모습은
1. 서로 사랑을 받는 자들이, 복음을 위한 동역자로 함께 일해야 합니다(1절)
사도 바울은 빌레몬을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our beloved brother)요 동역자(fellow worker)로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과 빌레몬은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to love) 사랑받는(to be loved)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사랑받고,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 온 것입니다.
빌레몬은 또한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동역자는 같은 일을 하는 동료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나 빌레몬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일하는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이 고귀한 일에는 신분 귀천 빈부 직업 성별 노소 등 어떤 제약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교회 안과 밖에서 누구라도 복음을 위하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동역자가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합니다. 동역자는 먼저 자신의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을 만난 후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웠습니다.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 여러 동역자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모든 사람들이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나아갔습니다.
끝까지 교회와 복음을 지키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24절에 나오는 데마 같은 사람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a)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끝까지 주님만 바라보면서 롱런(long run)하시길 축복합니다. 세상으로 눈만 돌리지 않으면 됩니다. 거창한 일이나 큰~ 일 안 해도 괜찮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내게 맡겨진 일에 정성을 다해 충성하시길 바랍니다.
예배당이 내가 사는 집보다 덜 정돈된 것 같으면, 더 열심히 청소도 하고 광도 내시기 바랍니다. 주보 접는 일이 내게 맡겨진 일이라면 엉터리로 하지 말고 정말 귀퉁이가 딱 맞게 접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일에 귀한 일 천한 일이 없습니다. 화장실 청소 당번이면 내 집 화장실보다 더 정성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빌레몬서를 통해 알게 되는 교회와 성도의 모습은
2. 우리 주 예수님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5절)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요21장). 시몬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양을 먹이라(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양을 먹이는 일에는 여러 가지 부수적인 일들이 수반됩니다. 꼴도 준비해야 하고, 물도 줘야 하고, 양 우리도 준비해야 하고 울타리도 튼튼히 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곳에 든든히 서서 예배하고 섬기며 봉사하는 각각의 직분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능력이 많으신 주님도 제자들을 동역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끝까지 잘 감당해야 하고, 이 주님의 일에 동역하는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주님을 대하듯이 성도를 대하고 섬기는 일도 중요합니다. 빌2:1~4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교회 안에서 왜 다툼이나 분쟁이 일어날까요? 내가 저 사람보다 믿음이 더 좋게 보이려는 욕심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낫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생각은 남을 나보다 “낫게”가 아니라 “낮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작대기 하나 차이지만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낫게” 입니까 “낮게” 입니까?
우리 각자의 믿음은 내가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나를 판단할 수가 없고 나도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내가 천국 가면 3번 놀랄 거라고 하잖습니까? 내가 오게 되어 놀라고, 저 사람이 와서 놀라고, 그 사람이 안 보여서 놀란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잘난 척할 필요도 없고, 누구랑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 뒤편에 앉아 주님 저는 부족합니다. 잘난 게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고백하시길 바랍니다(눅18:13~14).
그런데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제일 문제인 사람입니다. 자신이 겸손하다는 것을 일부러 드러내는 사람인데 실제로는 전혀 겸손한 사람이 아니고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을 감추려 한다기 보다는, 자신이 겸손하다는 것을 억지로 보여주려는 사람인데 전혀 겸손하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빌레몬은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도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도들을 사랑하고 믿음의 모범을 보이시길 축복합니다.
빌레몬서를 통해 알게 되는 교회와 성도의 모습은
3. 나의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해야 합니다(6절)
믿음의 교제(the fellowship of your faith)(NASB)는 교회 안에서 믿는 자들끼리의 단순한 친교나 사귐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주일날 예배드리고 성도들끼리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친목을 도모하는 게 믿음의 교제가 아니란 것이지요.
믿음의 교제는, 나의 믿음이 상대방과 소통하는 것(the communication of thy faith)(KJV)이고, 나의 믿음을 나눔으로써 믿음이 실제화(활성화)되는 것(be active in sharing your faith)(NIV)이고, 나의 믿음에서 나오는 관대함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put into action the generosity that comes from your faith)(NLT)-빌레몬이 오네시모에게 관대함을 보여주는 것을 믿음의 교제로 보았다-입니다.
바울은 빌레몬 자신이 믿음의 교제를 보여주기를(행하기를) 원했습니다. 주인인 빌레몬이 먼저 믿음으로 용서의 손을 오네시모에게 내밀 때, 믿는 자들의 속에 있는 선한 것들이 드러나게(영향력을 발휘하게) 되고, 이는 결국 주님을 위한 일이 된다고 했습니다(6절).
실제로 교회 안에서 시기와 질투,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한 다툼과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런 일들을 감추고 감정을 억누른 채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성도들이 있는 곳에는 선한 일들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주님을 위한 일도 하기 힘듭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의 교제를 하시길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빌레몬서를 통해 알게 되는 교회와 성도의 모습은
4. 성도들의 마음에 평안함을 주고 그로 인해 목회자에게 많은 기쁨과 위로를 주어야 합니다(7절)
빌레몬의 사랑을 본 성도들은 마음에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마음의 평안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마음이 새롭게 되었다 / 마음에 새 힘을 얻었다(refresh)는 뜻입니다.
빌레몬도 바울에게 복음으로 빚진 자였으므로(19절), 또한 바울 자신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빌레몬에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이 골로새 교회에 선한 영향을 많이 끼쳤겠지만, 그가 오네시모를 받아준다면 성도들은 마음에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사랑에는 힘이 있습니다. 나의 용서와 사랑이 상대방을 바꾸는 힘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용서의 드라마를 본 성도들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할렐루야!
나로 인해 성도들이 마음에 평안을 누리고, 위로를 받고, 새롭게 되고, 새 힘을 얻게 된다면 이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모습을 보는 목회자는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거창한 구호나 큰 일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큰 일, 작은 일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고 해야만 합니다.
평온한 시대에 필요한 믿음의 덕목은 단순하지만 끈질김입니다. 빌레몬이 행했고, 바울이 그에게 요구한 것도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덕목이 교회에 기쁨이 되고 성도의 마음에 새 힘을 주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늘 언제나 변함없는 교회와 성도로
주님의 복음을 위한 동역자로 끝까지 함께 일합시다.
우리 주 예수님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끝까지 헌신합시다.
우리의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끝까지 힘씁시다.
서로의 마음에 새 힘을 주고, 목회자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성도로 끝까지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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