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

가서 너도

paul han 2024. 1. 4. 19:52

10:25~37

가서 너도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대부분의 인간은 인생을 살면서 허무와 무상을 늘 느끼며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 인생이 짧고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질병과 같은 것은 원치 않는 덤입니다. 우리는 늘 죽음을 두려워하며 언젠가 마주하게 될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합니다.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죽음 즉 인간의 유한함에 대해 생각합니다. 가지지 못한 사람보다 오히려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삶에 대한 미련이 많음을 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많이 가진 것을 오래도록 누리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재물이 많은 청년 관리가 주님께 와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누릴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19:16~30, 10:17~31, 18:18~23). 젊은이가 왜 일찍부터(?) 영생을 찾고 있었을까요? 그가 많은 것을 누리고(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영생(eternal life,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에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불순종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임하게 되었습니다(3:19).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셨습니다(3:24).

 

그런데 인생에서 이렇게 중차대한 문제를 어떤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다른 말로 올무에 빠뜨리려고 질문했습니다. 율법교사는 율법학자, 율법전문가, “a lawyer”(NASB), “a certain lawyer”(KJV), “an expert in the law”(NIV), “an expert in religious law”(NLT) 등으로 번역되는데, 율법에 있어서 만큼은 변호사나 법학교수(법학자) 수준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이 율법교사는 무엇인가를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주님을 시험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학자였겠습니다. 그렇기에 율법은 ~하라, ~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율법학자가 무엇을 하여야라고 한데서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함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게다가 얻으리이까라고 했는데, “inherit”이란 단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는 유산을 상속받는 것과 같이 그것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부모나 조상에게서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이유는 말씀을 머리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응 그렇지 참 맞는 말씀이고, 좋은 말씀이야라고 하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지는 못할 때 무기력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적당한 운동은 활력을 주지만, 아무 것도 안하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무기력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 율법교사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라고 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신 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율법교사가 불순한 의도로 주님 앞에 섰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상태를 다 아시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즉 이 율법교사는 율법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단지 읽기만 하는 자였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는 글자를 읽을 줄 아느냐? 고 물으신 게 아니라, “How does it read to you?” 즉 그 율법의 말씀이 네겐 어떤 의미가 있느냐? 내지는 그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의미로 물으신 것입니다.

 

알기만 하는 것과 그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일입니다. 제 아무리 율법 박사라고 할지라도 행하지 않는다면 두루마리 속 지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율법교사의 속을 미리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는 율법교사답게 신6:5과 레19:18을 인용하여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27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며(all your heart) 목숨을 다하며(all your soul) 힘을 다하고(all your strength) 뜻을 다하여(all your mind)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heart)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적(感情的)인 마음을 말하고, 목숨(soul)은 요즘 말로 영혼까지 끌어모아 사랑하는 것입니다. 힘을 다한다는 것은 육신적인 힘(strength)을 다하는 것이고, (mind)을 다한다는 말은 이성적(理性的)생각까지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웃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본능입니다. 인간은 이타적이기보다는 무조건 이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만만한 사랑이 아닙니다. 엄청난 사랑입니다.

 

불순한 율법교사였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할렐루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행하면 살게 됩니다.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율법교사는 주님께 내 이웃이 누구냐고 다시 질문했습니다. 29절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그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주님께 재차 질문했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wishing to justify himself”(자신의 옳음을 보여주기 원하여 자신을 정당화/해명하기 원해서)(NASB)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했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변명하기 위해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어 성경 구어역(口語譯)自分立場弁護しようと って”(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싶어서)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옳게 대답을 했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이웃을 의식하지 않고(모르고) 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그가 주님 앞에서 계속 잘난 척을 하고 그간의 행동을 변명하기 위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중에 등장하는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을 통해 이웃은 누구인지, 이웃이 되려면(이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1. 이웃은 오늘 강도 만난 사람처럼 어려움에 처하여 죽게 된 사람들입니다(30)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를 버리고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움에 처하거나 거의 죽게 되어 버려진(방치된) 자들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이웃이 돼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느냐고 묻던 부자 청년 관리에게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18:22)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게 바치라고 하시거나 회당 건축에 쓰게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가난한 자들이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 할 이웃입니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사랑이 전제된 이웃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두가 살게 됩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할렐루야!

 

2.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피하면 안 됩니다(31~32)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그 길로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모른 채 피하여 건너편(반대편)(on the other side)으로 지나갔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간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다 성전에서 일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사랑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 이웃 사랑은 없었습니다. 이웃을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역지사지로 제사장이나 레위인 자신이 강도를 만나 죽게 되어 길에 버려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 교회가 선한 영향력을 많이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인정하기 싫어도 교회를 향한 시선은 그리 좋지 않음을 느낍니다. 이제 모든 교회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 사랑이 전제된 이웃 사랑을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죽게 된 이웃을 피하지 않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고난에 처한 이웃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거기를 지나 여행하던 중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he felt compassion). 그 자리와 사람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을 보셨지요? 강도가 출몰하는 자리는 보자마자 피하려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피하기는커녕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응급 처치를 했습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기 짐승 아마도 나귀에 태워 주막/여관(an inn)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an inn)에 두고 바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를 다음날까지 돌봐주었습니다. 그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compassion은 우리 주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11:35), 모든 도시와 회당에 다니시면서 만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Seeing the people, He felt compassion for them)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9:36). 칠병이어의 현장에 모인 무리를 향해서도 주님은 이 compassion을 느끼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I feel compassion for the people)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15:32)

 

4. 이웃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35)

 

사마라이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주면서 하루를 주막(여관)에서 지냈습니다. 그가 단순 여행객이었다고 할지라도 시간을 내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이 만일 어딘가에 여행을 하고 있거나 급한 일로 먼 길을 가고 있다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기꺼이 시간을 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돌봐줄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NASBKJV성경은 이 사마리아 사람의 여행(33)“journey”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특히 장거리 여행(여정)에 쓰는 단어입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일지 아니면 더 먼 곳으로 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여유가 없었을 상황이었다는 것이지요. 서울에서 인천을 가는 사람하고, 부산을 가는 사람하고는 그 분주함이 다를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이튿날 여관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주며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주도록 부탁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아직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데나리온 둘은 품꾼의 이틀 치 품삯입니다. 당시 기준으로 적은 돈이 아닙니다. 더 놀랄 일은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한 것입니다.

 

돌아올 때에라고 한데서 이 사마리아 사람(사마리아-->예루살렘 방향)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예루살렘-->사마리아 방향)과는 그 가고 있는 방향 만큼이나 행동도 정반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불순한 율법교사에게 물으셨습니다. 36절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율법교사가 대답했습니다. 37a입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사실은 자기들도 몰라서 알고 싶은 문제를, 가지고 와서 질문을 퍼부은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소위 빼박 해답을 주셨습니다. 다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정답을 주신 것입니다.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한 율법교사에게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37b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할렐루야!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5:31~40을 우리 함께 교독하고 마치겠습니다.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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