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2:38~44
주님의 독트린
38.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높은 자와 낮은 자가 함께 존재하는 세상입니다. 100% 부유한 자만 사는 나라나 100% 가난한 자만 사는 나라는 지구 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중국 최고통치자가 ‘공동부유’라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면 모두가 부자로 살아보자는 말입니다. 사회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라고 하겠는데, 부자들이 가진 것을 강제로 빼앗아 없는 자들과 나누자는 정책입니다. 그런데 그 정책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요? 국가와 국민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결과로 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100%가 상전인 나라나 100%가 노예인 나라도 존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어느 고립된 섬에 노예 100명을 데려다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계급이 생기고, 위 아래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성경의 가르침도 같습니다. 엡6:5,9입니다.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9.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무시되었기에 아이들도 학교에서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할 줄 모르고, 나아가 다른 권위를 인정하고 따를 줄 모르는 세상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를 다 인정하십니다. 우리는 부자냐 가난하냐 이것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느냐에 중점을 두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아 부유하게 된 사람이 있다면 단지 그가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비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명확합니다. 어느 특정 편이나 집단이 항상 옳다고 하는 생각은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출23:2~3)
부자나 가난한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나 그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 올바르면 칭찬과 상급을 받고, 옳지 않을 때는 당연히 비난을 받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삼상25장에 나오는 나발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가르치셨을까요? KJV이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He said unto them in His doctrine”(예수께서 교리를/교리로서/교리 중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습니다. 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다해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나 주일을 성수하라는 말씀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만 가지고 본다면 독트린(교리)은 쉽게 표현해서 우리의 신앙 여정을 좀 더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안내해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독트린Ⅰ
주님께서 조심하라고 하신 서기관들(the scribes)은 율법 교사요 학자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을 향해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들 조심해’ 라고 한다면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실까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서기관들은 그 직분에 걸맞게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이용했습니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원래 긴 옷을 입는데 주님께서는 왜 서기관들이 긴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고 책망하셨을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긴 옷은 예복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나 입을 예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는 뜻입니다. “the scribes who like to walk around in long robes”(긴 예복을 입고 이리저리 걸어/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서기관들)(NASB)이었습니다.
이 일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긴 예복을 입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문안 즉 존경의 인사(respectful greetings)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아주 가관입니다. 그 장소는 바로 장터(the marketplaces)였습니다. 시장엔 사람들이 많잖아요? 거기서 예복을 입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굽신굽신 인사받는 것을 좋아하고 즐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회당의 높은 자리(the chief seats in the synagogues)와 잔치의 윗자리(the uppermost rooms at feasts)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셔야 마땅한 주님께서는 그러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낮추고 낮추사 종의 모습으로 섬기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이렇게 겉으로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해 보이고 싶어하는 자들이었지만, 속으로는 썩은 것이 가득한 무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devour widows' houses 과부의 집 재산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for a pretence make long prayers 사람에게 보이려고 가식으로 오래 기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는데(신10:18), 그들은 과부에게 불의를 행했습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하는 모습을 연출했습니다.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기도 아닌 기도를 했다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을 능멸하는 행위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하심으로써 그들이 받을 벌이 무거울/무서울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these shall receive greater damnation”(이들은 더 큰 저주/지옥살이를 받을 것이다)(KJV), “Such men will be punished most severely”(그런 자들은 가장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NIV)
독트린Ⅱ
주님께서 성전 안의 헌금함을 저만치 마주 보시고 앉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함에 헌금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여러 명의 부자들이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가난한 과부는 와서 아주 적은 돈을 넣었습니다. 그녀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헌금했습니다.
렙돈은 헬라(그리스)동전이었고, 고드란트는 로마 동전이었습니다. 그 가치는 아주 작았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 설명을 해도 잘 와닿지 않을 것이기에 영문 성경으로 설명을 하겠습니다. “two small copper coins, which amount to a cent”(두 개의 작은 동화/동전은 1센트에 해당한다)(NASB). 1센트는 1달러나 1유로의 1/100입니다. 1달러가 우리 돈 1,300원이므로 1센트는 13원 정도가 됩니다. 정말 작은 돈이지요. 아마 두 렙돈으로 작은 빵 두 개 정도는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주님께서는 “진실로”라는 표현을 하시면서까지 이 찢어지게 가난한 과부가 가장 많이 헌금함에 돈을 넣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비교할 때는 상대적으로 해야 되겠지요. 재벌 회장에게 백만 원은 돈도 아니지만, 서울역 노숙자에게는 만져보기 힘든 거금인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부자들아 더 분발해라 일까요? 가난한 과부야 너 정말 잘했다 일까요? 물론 주님의 말씀 속에서 이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으로 볼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만, 다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앞서 말씀하신 옳지 못한 서기관들을 향한 메시지일 수는 있겠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서기관들에게 가산을 몽땅 빼앗긴 과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었다고 해서 굶어 죽게 되었을까요? 단언컨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판의 풀 한 포기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이 과부를 절대로 굶기시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는 풍족한 중에서 많이 드린 부자들의 헌금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도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의미를 오해하면, 부유한 자들이 드리는 헌금이나 헌신을 가난한 과부와 비교해서 우습게 보는 시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금액의 크기에 상관없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출25:1~2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고후9:7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독트린(교리)으로서의 두 가지 교훈을 주셨습니다.
먼저는 말씀에 등장하는 잘못된 서기관 같은 자들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변에 자신의 유익과 명예를 위해 하나님의 일을 도구처럼 사용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몰라도, 구원받고 신앙생활 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알고 주의하면 더 좋겠지요. 속상할 일도 없겠구요.
다음으로는 가난한 과부가 한 헌금에 대한 독트린은 누가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말씀하시려는 게 아니라, 정말 작게 헌금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가장 많이 드린 것이라는 관점을 배우게 하시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데 충분한 헌신을 하는 부유한 사람들도 주님이 보실 때는 다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인간들은 편 가르기를 매우 잘하지만,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은 편 가르기가 아니라 오히려 편 모으기를 하게 하시는 말씀임을 기억하면서, 교회 문을 나서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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