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12:7~15a
망하는 길로 가지 않으려면
7.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9.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0.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13.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4.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15.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된 사람이라고 생각해 온 경향이 있었습니다. 있었다 라고 한 이유는 이제는 그렇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자신은 끝까지 잘못한 게 없다고 하는 사람을 오히려 추앙하고 따르는 이상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습니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3:8). 그리고 나서는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가인도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난 후, 아벨을 찾으시는 하나님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라고 뻔뻔하게 대답했습니다(창4:9).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셔서, 아담 --> 셋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이어졌지만, 아담 --> 가인을 잇는 계보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물론 노아 홍수로 말미암아 셋으로 이어지는 계보만 남은 듯 보이지만, 첫 사람 아담의 죄가 가인에게 이어졌듯이, 셋에게도 이어졌고 노아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은 범죄한 인간이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고 그 길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못하는 자는, 죄악된 길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먼저 죄인임을 자각하고 고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죄를 용서받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이제 다시는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었던 죄악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저지를 죄악들을 얼굴을 들고 버젓이 행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경고를 우리 모두에게 하셨습니다. 방금 본 겔33:11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12~13절입니다.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지난 주일의 말씀 기억하고 계신가요? 좁은 문을 지키고 계신 주님께서 거기로 들어갈 자와 못 들어갈 자를 판단하신다고 했는데, 그 기준이 악을 행하는 여부라고 알려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립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실 당시의 행악자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포함될 것입니다.
오래 전 세상을 떠나신 강남의 모 교회 목사님이 롬8장만 있어도 우리가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셨다는데, 그렇게 말씀을 한정한 것에 저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내려는 시도 때문에 우리가 목숨을 내놓아야 할 상황에 이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으로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지, 죄를 짓고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며 살아도 이미 구원받은 존재이니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구원은 싸구려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치욕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고 주신 엄청나게 귀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문제가 불거진 우리나라 최대 교단의 총회장 사생활 문제는 우리의 앞길을 암울하게 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이라 생각되지만, 그 충격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전한다는 사람들이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구원론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고, 소위 열매론에 주목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6~20).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워졌고, 다윗은 그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올랐습니다. 왕이었다는 공통점 외에 두 사람은 극적으로 대비되는 인물입니다. 인본(인문)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울은 여성 편력이 없고 딱히 흠을 잡을 데 없는 사람입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됐던 것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권력자의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으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인본주의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한 것을 더 멋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반면에 동일한 관점에서 다윗은 아주 나쁜 왕이라 인정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다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약점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매몰되면 그것이 집착으로 발전되고, 결국 그로 인해 문제를 일으키고 마지막에 실패한 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다윗의 약점은 여자였습니다. 다윗은 도망자 신세임에도 나발이 죽자마자 그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는, 소위 여자를 밝히는 사람이었습니다(삼상25:39). 다윗이 진짜 그런 사람이라면 나발을 죽이고 아비가일을 빼앗지 않았겠느냐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할 만큼 다윗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다윗의 이런 약점은 충신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데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다고 책망하시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인본주의의 눈으로 보면 사울은 칭찬받을 만한 왕이고, 다윗은 충신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은 아주 파렴치한 왕입니다. 그런데 신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정반대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우리 중 누구도 사울을 보고 선한 왕, 하나님께 인정 받은 왕이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을 보고 그렇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보는 눈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범죄했더라도 즉각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3a절입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그렇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하신 책망을 듣자마자 자신의 죄를 자복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만일 다윗이 즉시 죄를 인정하지 않고 핑계를 대거나 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을 것입니다(렘33:13). 사울보다 더 못한 것 같은 다윗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이유는,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철저하게 용서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람들(백성들)의 말을 따랐기에 버림받은 왕이 되었습니다(삼상15:24). 인본주의적으로는 백성들의 말을 존중하는 왕이 더 좋은 왕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게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 혹시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즉시 용서를 구하고 그 길에서 돌이키는 사람을 하나님은 인정하십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말을 따르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시길 축복합니다. 사람의 말을 따르지 말라거나 신경 쓰지 말라고 해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믿는 우리가 빛과 소금의 삶을 살지 못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면 세상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물론 세상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악을 따라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악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워야 할 일들도 있을 텐데, 그때는 목숨을 걸고 싸우시길 바랍니다. 마땅히 대항해야 할 거악을 피하여 숨는 자들이 되지 마시길 축복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옆에 있는 성도들을 실족시키고 자신도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구원의 확신과 감격으로 세례를 받고 예배드리며 봉사했던 사람들이 왜 저렇게 됐나 하고 의구심을 가진 적이 여러 번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됩니다.
고집이 셉니다. 목회자나 다른 성도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만합니다. 그렇기에 은연중에 자기가 최고임을 드러냅니다.
오늘 말씀처럼 자신의 잘못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이유는 그들의 목이 곧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도, 지도자 모세의 충고도 듣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 왕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책망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에 왕의 권위를 내려놓고 자신을 굴복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일 성경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인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행적을 잘 살펴보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은 복된 길로 갔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망하는 길로 갔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신앙 여정 가운데 실수하고 잘못하는 일이 없어야겠지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겼다면 다윗처럼 즉각 하나님께 범죄를 인정하고 용서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성경의 범죄자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부인하고 핑계를 댔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명심하시길 소망합니다.
심판자 되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가 맺는 열매로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혀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 중심인 인본주의에 열광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중심인 신본주의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울처럼 사람의 말을 청종하지 마시고, 다윗처럼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는 성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과 말씀 앞에 목이 곧은 자들은 망하는 길로 가는 첩경에 들어선 자들입니다.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일평생 순종하며 사시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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