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혼자 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엘리야에게 여호와께서는 힘이 되는 소식을 주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이 7천 명 외에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었고 거기에 더해 바알이 너무 좋아 입을 맞춘(kissed)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주일이 멀다하고 터져나오는 한국 교회의 좋지 않은 뉴스에 가슴이 철렁하고 조마조마합니다. 또 다른 대형 사건이 터져 망신을 당하고, 전도 길이 막히게 될까봐 항상 걱정입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요즘은 하나님께 점수를 따기가 상대적으로 쉬워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2~3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신실하고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었다고 생각되므로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하나님께도 특출나 보이는 목회자가 많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때와 많이 달라 보입니다. 돈 아니면 여자 아니면 명예나 권력이라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나자빠지는 목사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무릎 꿇는 것보다 더해, 키스를 퍼붓는 목사들이 꽤나 보입니다. “아니 저 분이 여자 문제로 목회를 못하게 됐어?” 라든지 “저 영감님 아직도 그 자리 한 번 더 차지하려구 안달이 났네” 또는 “돈 없이 목회가 가능하겠어?” 등등입니다. 솔직이 돈 문제에는 그 누구도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지 모릅니다. 또한 목회의 본질을 잃고 ‘예수님 목회’가 아닌 ‘내 목회’를 하는 목회자가 많기에, 조금만 본질에 충실하면 금방 하나님의 눈에 띌 수가 있겠습니다. 솔직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눈에 띄는 목회를 해야 하겠지요?
이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입을 맞추지 않은 7천 명에 들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목회 여정을 가야만 하는 양자택일-여호와냐 바알이냐-의 기로에 섰습니다.
목사들이 이럴찐대 평신도 그룹은 어떻겠습니까? 시스템과 프로그램이 잘 갖춰진 예배당에 앉아서 예배를 참관하고, 한 주일 내내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생활을 하다가 주일 아침 달랑 예배 한 번 참석하고 다 해결된 것처럼 착각하고, 내가 먼저 다 쓰고 조금 남겨서 하나님께 시간이나 물질을 드리는 성도들이 적지 않은 현실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세우는게 있다면 그게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내 인생이, 내 자녀가, 내 사업(직장)이 더 중요하다면 그게 모두 우상입니다.
바알이 하나님보다 더 좋아 보였기에 여호와를 버린 것처럼, 돈 여자 명예가 하나님보다 더 좋다면, 7천 명에 드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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