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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창세기20장

창세기 20장

 

20장을 읽으세요.

 

요약: 아브라함이 그랄로 거처를 옮기면서 ‘제2차 사라 누이호칭 사건’이 벌어진다. 사라를 자기에게 데려간 아비멜렉에게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경고하셨기에 모든 일은 잘 정리되고, 아브라함의 기도로 아비멜렉을 포함하여 집안의 모든 닫힌 태가 치료된다.

 

 

생각해 볼 의문점들 ©

 

① 아브라함은 ‘아브람’ 시절의 ‘사래 누이호칭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파렴치한 사람인가?

② 90세나 된 할머니 ‘사라’를 어디가 좋아서, 아비멜렉은 앞뒤 가리지도 않고 그녀를 데려갔는가.

③ 왜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신 것과 같이, ‘아비멜렉’에겐 무서운 경고를 하시고(3절,7절) 아브라함에겐 별다른 말씀 없이 그냥 두셨는가.

 

☞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초기에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을 때나, 헤브론을 떠나 ‘그랄’에 체류(sojourn)했을 때의 시대상황은, 자기자신 외에는 누구도 나의 안전을 지켜줄 수 없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게다가 ‘바로’나 ‘아비멜렉’이나 당시의 왕들은 남자를 죽이고 남의 여자를 빼앗는 일을 너무나 당연하게 아니 오히려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는 도구로 삼았음직하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해도 일개인(一個人)이 왕권(王權)을 소유한 세력과 대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을 아브라함이(11절) 실제로 이복누이였던 사라를 ‘아내’라고 하지 않고 ‘누이’ 라고 불렀다고 해서 못난 인간 내지는 거짓말쟁이라고 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은 그더러 “이복동생도 동생인데 어째서 아내로 삼았느냐” 라는 질문만큼이나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백 세와 구십 세가 된 부부가 뭐가 무서워 그렇게 행동했나 하면서 (우리가)혀를 끌끌찬다고 해도 비난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②’ 처음에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도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사라의 미모에 반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녀의 수명이 127세였고 당시 90세의 나이였음을 감안하면 이제 별 볼일 없는 할머니가 돼버린 사라를 왜 아비멜렉은 취하려 했을까? 아마도 아브라함의 명성과 (아브라함이 자기의 모든 재산을 정리한 후 모든 종들을 거느리고 헤브론을 떠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가속(家屬)의 규모등을 보고(16절) ‘정략결혼’을 하려 했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90세가 된 사라도 여전히 남자가 반할만한 미모와 매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③’ 우리가 18장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제 아들을 주시겠다는 언약은 임박한 상태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다가와 있다. 19장은 소돔과 고모라 사건으로 제외하고 바로 뒤 21장에 가면 약속의 자손 ‘이삭’이 태어난다. 즉 이 20장은 임박한 언약의 성취를 앞두고 일어난 돌발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살다보니 어쩌다 일어난 우연한 사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아브라함이 ‘그랄’로 내려간 이유도 성경은 설명해 주지 않고 있다. 그래서 본장이 해석상 어려운 점이 있었다. 따라서 위의 ①과 같이 아브라함의 ‘거짓말’에 초점을 맞추고 읽다보면 본장이 너무나 생뚱맞게 다가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왜 갑자기 그랄로 갔으며, 두번씩이나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하고, 아비멜렉은 사라를 그냥 데려갔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급하게 아비멜렉을 막으셨는지 등등 말이다. 사라를 데려간 날 아비멜렉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막으시지 않으셨다면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당연히 파기(破棄)되었을 것이다. 사라는 127년을 살면서 약속의 아들 ‘이삭’ 한 사람만을 생산하고 이 땅에서의 임무를 다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 임무는 너무나 중요하기에 방해세력이 개입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15:11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언약 방해세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게 활동영역을 넓혀가는 중이었다. 아비멜렉이 이때 사용될뻔한 것이다. 이 사건 당시 아브라함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해 가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 실제로 후일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할만큼 성숙한 자가 된다. 그렇기에 두번씩이나 사람을 속인 자로 (지금 우리들로부터도) 손가락질을 받았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면책(免責)되었던 것이다. 물론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시대상황과 아브라함이 처한 형편을 보시고(13절) 정상을 참작하신 면도 없잖아 있다고 보인다. 한가지만 더 첨언한다면 이 사건에서 아비멜렉은 약속의 ‘적극적 방해자’(그의 행위로 언약이 파괴될 수 있다는 의미)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소극적 방해자’(언약파괴의 빌미를 제공한다는 의미)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남방으로 이사하여…그랄에 우거하며 (1절)

 

개역한글 성경은 ‘이사’ 라는 표현을 썼다. 개역개정 성경은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그랄에 거류하며’ 로 번역했다. NLT Bible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Abraham moved south to the Negev and settled for a while between Kadesh and Shur at a place called Gerar.”(아브라함이 남쪽 네게브로 옮겨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잠시 동안 이주했다.)

남방(南方)은 12:9 에 나오는 남방과 같은데, 네게브 사막을 말하며,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가기 전에 옳겨 거주했던 지역으로, 후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질 약속의 땅 최남단이었다(신34:3).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4절) ©

 

아비멜렉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는 그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무섭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었을 것이다.

그가 ‘주’(Lord) 라고 호칭한 것은 꿈에 나타난 신(神)적인 존재를 극존칭을 사용하여 부른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우리는 그분을 하나님이시라고 너무나도 명백히 알 수 있지만 말이다. 후일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그분을 ‘하나님’(God)으로 호칭하게 된다(21:22).

‘의로운 백성’의 의미는 여기서 사라를 무력으로 빼앗지 않았음을 즉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번 사라의 사건에서 자신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남매관계'라는 얘기를 진정으로 믿었다는 의미이지,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로운 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KJV은 righteous nation(의로운 백성), NIV은 innocent nation(무죄한 백성), NLT은 innocent man(무죄한 사람), NASB은 blameless nation(결백한 백성)등으로 번역했다.

 

 

그는 선지자(先知者)라 (7절) ©

 

아브라함은 최초의 선지자였다. 그것도 자칭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인정받은 선지자였다.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뜻(생각)을 먼저 알고 있는 자’ 라는 뜻이겠지만,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받은 자(렘1:5 등) ㉡하나님의 마음(말씀)을 전달하며 가르치는 자 ㉢하나님께 대신 간구하는 자(왕상18:42, 단9:3 등) 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라는 말씀에 비춰 ㉢과 같은 일을 하는 선지자로 보아야 한다.

 

 

이복 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12절) ©

 

오늘날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법적(法的) 도덕적(道德的) 의학적(醫學的)으로도 큰 문제가 될 일이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방법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 이르기까지는 드러나게 근친혼(近親婚)을 통해 가족의 숫자가 늘어난다. 후에 야곱의 집안 사람들 70명이 애굽으로 내려가 430년 만에 수백만으로 늘어나게 된다.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인류가 시작된 것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의 인간창조를 믿지 못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방법이다. 지금 나(我)와 세상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방법을 불신(不信)하지 말라!

 

 

내게 베풀 은혜 (13절)

 

아브라함이 아버지 집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할 때 아내 사라로 인해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 봐 두려워 사라에게 자신을 오라비(오빠)라고 부르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했다. 이 ‘은혜를 베푸는 것’을 영문성경은 ‘애정(kindness) 또는 사랑(love)을 보이는 것’으로 번역했다.

 

 

은 천 개 (16절)

 

은 천 세겔을 말한다. 1 세겔은 11.4g 이므로, 천 세겔이면 11.4kg이나 된다. 고대 바벨론 노동자는 한 달에 약 반 세겔의 임금을 받았다고 한다.(창세기, 두란노아카데미刊,302쪽)  이것으로 계산해 보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준 은 천 개는 2,000명 노동자의 한 달치 임금이 된다.

 

 

너와 함께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16절) ©

 

① 아브라함의 집안 사람들에게 안주인 사라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될뻔한 사건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수치였다.

② 아비멜렉이 큰 돈을 줌으로써 자신의 실수로 인정하고, 아브라함과 사라에겐 잘못이 없었음을 공식적(公式的)으로 공표하려는 것이었다.

③ 또한 속죄금(贖罪金) 성격의 금전을 지급하여, 벌어진 일을 깨끗하게 정리하고자 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17절) ©

 

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 한 일 때문에 아비멜렉의 집안 모든 여자들의 태(胎)를 ‘쳐서’ ‘빨리’ ‘닫으셨다’.

② 선지자 아브라함이 기도했을 때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셔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하셨다. 아비멜렉도 치료받은 것을 볼 때 남자구실을 못하게 하셨다가 치료하신 것 같다.

 

 

[문제20-1] 다음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아브라함이 옳긴 남방(South country)은 네게브 땅을 말한다.

② 남방으로 아브라함 부부만이 옮겼다.

③ 현몽(現夢)이란 꿈에 나타나셨다는 뜻이다.

④ 아비멜렉은 하나님께 자신이 결백함을 주장했다.

⑤ 하나님께서도 아비멜렉이 정직함을 인정하셨다.

 

 

[문제20-2] 다음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사라를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아비멜렉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것이었다.

② 아비멜렉이 간밤의 일을 자기 신하들에게 얘기했을 때 그들은 몹시 두려워했다.

③ 아비멜렉은 자기를 속인 아브라함을 나무랐다.

④ 아비멜렉은 사라를 돌려보내며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 그리고 노비를 주었다.

⑤ 아비멜렉은 사라에게 은 천 개를 주어 수치를 풀게 하였다.

 

 

[문제20-3] 맞는 것엔 O표, 틀린 것엔 X표 하세요.

① 사라 문제로 인해 아비멜렉 통치하의 모든 백성의 태(胎)가 닫혔다. (   )

②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라고 인정되었다. (   )

③ 아브라함은 그랄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   )

④ 아비멜렉이 준, ‘은 천 개’는 ‘은 천 세겔’을 말한다. (   )

⑤ 아비멜렉은 언약의 적극적 파괴자로 작용할 뻔 했다. (   )

⑥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이리저리 다니면서부터 자기 아내에게 자기를 오라비라 부르게 했다. (   )

⑦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이 준 가축과 종들로 인해 부자가 되었다. (   )

⑧ 아비멜렉은 자신이 지정해 준 땅에 아브라함이 거하길 원했다. (   )

⑨ 아브라함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아비멜렉 집안에는 아기울음 소리가 영원히 그쳤을 것이다. (   )

⑩ ‘그랄’은 ‘가데스’와 ‘술’ 사이에 있었다. (   )

⑪ 아비멜렉이 사라에게 얘기할 때 아브라함을 ‘오라비’라고 호칭함으로써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   )

 

 

 

암송할 구절

7절

14절

16절

17절

18절

 

 

정답

[문제20-1] ②

[문제20-2] ⑤

[문제20-3] ① X  ② O  ③ O  ④ O  ⑤ O  ⑥ O  ⑦ X  ⑧ X  ⑨ O  ⑩ O  ⑪ O

 

해설

[문제20-3] ⑪ 은 천 개를 주어 사라의 수치를 풀게 하고, 다 선히 해결하려는 아비멜렉이었지만 그의 개인적인 감정까지 정리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비멜렉은 ‘오라비’ 라는 호칭을 의도적으로 써서 자신의 심기를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Copyright © 2009 by Paul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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