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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창세기33장

창세기 33장

 

33장을 읽으세요.

 

요약: 에서가 당도하자 야곱은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며 그를 맞이한다. 20년만에 두 사람은 눈물로 상봉한다. 야곱은 길을 인도하겠다는 형의 제안을 거절하고 숙곳에 머물게 된다.

 

 

그 자식들을 나누어…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1~2절)

 

 빌하와 실바가 낳은 자식들과 후일 그들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 별로 유쾌하지 않을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에서가 실제로 400인을 거느리고 눈 앞에 보이게 되자,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이것이다. 빌하와 실바를 포함한 그녀들이 낳은 자식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같은 아들인데 우린 총알받이나 하고 이게 뭐람”

 지금의 우리는 야곱이 한 행동을 보고 비난을 할 것까진 없다고 생각된다. 그를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20년 전 ‘라헬’을 보고 첫 눈에 반해 그녀를 얻는 대가로 7년을 봉사하기로 자원했었다. 야곱은 라헬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이셔서 4명의 여인을 통해 11명의 아들들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라헬과 그녀가 낳은 ‘요셉’을 더 끔직이 생각했을 것이다. 야곱의 그런 감정까지 비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뒤에 라헬의 사망으로 모친을 잃게 된 요셉이 가여워서 그에게 더 애착을 보이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요셉이 형들의 손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는 사건도 발생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아들이 큰 일(가족을 살리고 애굽에 정착하게 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야곱이 다른 아들들에게도 요셉에게 한 것처럼 대해 주었더라면 그들도 더 큰 일을 하지 않았을까 라고 한다면 너무 비약일까?

 

 

자기는…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3절)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10절)

 

① 지난 날의 잘못아닌 잘못 때문에 자기와 처자식이 해를 입을까봐 걱정하던 야곱에게 드디어 20년 전 아버지를 곡하고 나면 아우를 죽이리라 마음먹었던 형이 나타났다. 그는 ‘일곱 번’ 즉 철저하고 완전하게 자신을 낮추며 에서를 맞이한다. 10절의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라고 말하는 야곱의 모습에서 그가 상당히 처세에 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샌님과 같은 면이 있다는 것은 에서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의미이지 그가 아무 것도 모르는 쑥맥이라는 뜻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것과 같은 밧단아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②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본 장에서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야곱이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아부성 멘트로 형의 마음을 돌리려 하지만, 그가 지난 날 형이 받을 축복을 속여 가로챈 것에 대한 사과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형에게 ‘은혜만을 구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고 보여진다.

③ 성경은 에서를 ‘망령된 자’(godless person)= ‘버림받은 자’=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 자’ 라고 하고 있다(히12:16~17).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릴 줄 아셨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하시진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설령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에 기한 축복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었기에 지금에 와서 형에게 은혜를 구할지언정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것까지 용서를 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④ 즉 야곱은 인간적인 미안함과 어차피 고향으로 돌아오려면 결자해지의 입장에서 형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축복 사건’까지 용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언약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럴 필요도 없고 옳은 일도 아니다. 성경은 이 점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다.

⑤ 참고적으로 이 10절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은 번역상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개역개정판도 그대로 두었다. 이렇게 바꾸면 좋겠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본즉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것 같사오며…’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피차 우니라 (4절)

 

① 에서가 먼 길을 왔을 때 야곱이 달려가 형을 맞은 게 아니고 에서가 달려와 야곱을 맞았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벧엘에서 야곱에게 약속하셨고(28:15), 하란에서 약속하신 대로(31:3), 그리고 ‘브니엘’에서 축복하신 대로(32:29) 형 에서와의 문제는 평안히 해결될 것이었다. 20년 만의 형제 상봉에서 서로 끌어 안고 울었다면 다~ 끝난 얘기 아닌가!

② 90대가 된 쌍둥이 형제에게 무슨 미련이나 원망이 남아 있으랴. 후일 이 두 사람의 후손들은 ‘이스라엘’과 ‘에돔’이 되어 견원지간의 길을 가게 되지만, 지금은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때로는 시간이 좋은 약이 되기도 하나보다.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12절)

 

 앞잡이’는 앞에 서서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일제시대와 6.25남침 전쟁을 겪은 우리 역사에서 보면 이 뜻보다는 주구(走狗) 즉 끄나풀의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개역개정은 ‘앞잡이가 되리라’를 ‘동행하리라’로 했다. 그러나 이것들 보다는 가나안에 들어 온 야곱의 길을 인도하겠다는 의미로 ‘안내자가 되리라(안내하리라)’ ‘인도하리라’ 가 더 적절하리라 생각된다.

 영문 성경은 NIV (I’ll accompany you 동행하리라)  NLT (I will lead the way 길을 인도하리라)  NASB (I will go before you 네 앞장 서리라) 각각 달리 번역했다.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14절)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5절)

 

① 성경은 일어난 모든 일을 시시콜콜 우리에게 알려주기 보다는 베일에 싸여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도록 했다. 야곱이 실제로 형 에서의 활동 본거지를 실제로 방문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 14절에서 세일로 가서 에서를 만나겠다는 얘기는 우리가 흔히 하거나 듣게 되는 소위 인사치레라고 봄이 적절하리라 생각된다. 우리도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헤어지면서 한번 방문하겠다고 할 때가 종종 있다. 길을 안내할 테니 같이 떠나자는 형의 제안에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약하고 가축들도 젖먹이는(nursing) 새끼가 있으니 곤란하다고 하면서 형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하는 방법으로 세일(Seir)로 가겠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

② 에서가 써비스 차원에서 자신의 종자(從者) 몇을 남겨두겠다고 한 제안 마저도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며 완곡히 거절하게 된다. 즉 야곱은 형과 화해를 한 것으로 그와의 관계를 더 진전시키지 않으려 했음직하다. 에서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고 야곱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건 야곱의 의지였건 간에, 에서와 함께 하지(accompany) 않는 것이 순리였던 것이다.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17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18절)

은 일백 개로 사고 (19절)

 

① 숙곳(Succoth)은 ‘막(幕)’ ‘우릿간(booths)’의 뜻이다. 앞 장에서 야곱이 여기에 집까지 짓고 오래(?) 머무른 것에 대해 문제가 있음을 제기한 바 있다. 형 에서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그가 아버지 집에서 완전히 떠나기를 바라며 여기에 머무르려 했는지 모르지만 귀향 중에 머무른 중간 기착지에서의 생활은 상당히 길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어쩌면 야곱의 눈을 번쩍뜨게 만든, 보기에 살기에 좋은 곳이었을 수도 있겠다. 여기도 물론 가나안(숙곳은 가나안이 아니고, 세겜은 가나안. 아래 ④참조)이지만 그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숙곳'처럼 우리의 발목을 잡는 곳(것)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② ‘세겜’은 ‘하몰’의 아들로서 아버지로부터 일정지역을 나눠받아 통치했던 것 같다. 그곳을 세겜 성(city)이라고 불렀으며, 야곱이 그 성 앞에 자신의 가속들을 위해 장막을 쳤고, 단을 쌓았다.

③ 야곱은 장막 친 땅을 은 100개(히.케시타)(a hundred pieces of silver)를 주고 샀는데,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서 막벨라 굴을 살 때 지급한 화폐 단위인 ‘세켈’과의 차이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케시타’의 중량이 얼마인지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가나안에서도 지역과 족속에 따라 화폐단위(즉 은의 무게)가 달랐다는 것 정도만 짐작할 수 있겠다.

   ④ 사실 17절의 숙곳 거주기간과 18절의 세겜 즉 가나안에 들어 온 때를 구분하기는 불가능하다. 숙곳은 얍복강을 건너자마자 있는 곳이지만 여전히 요단 동편이고, 세겜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있는 지역이다. 두 지역의 거리는 약 30km 정도 된다. 엄밀히 말하면 두 지역은 전혀 다른 지역이다. 그렇지만 성경 기록상 야곱의 두 지역 거주기간을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므로 편의상 같은 지역에 거주한 것(숙곳=세겜)으로 보는 것이다.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20절)

 

① ‘엘 엘로헤 이스라엘’(El-Elohe-Israel)의 의미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God, the God of Israel) 이다.

② 여기의 ‘단을 쌓다’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일반적으로 단을 쌓는다고 할 때 사용되는 ‘바나’(build an altar)가 아니라, 기둥과 같은 단을 쌓는데 사용되는 ‘히찌이브’(erect an altar 또는 set up a pillar)를 사용했다. 이것은 그가 28:18, 35:14 에서 세운 그것과 동일하다.

③ 그는 어쨌든 중간 기착지라 하더라도 숙곳 즉 가나안 땅 세겜 성까지 무사히 먼 길을 인도하시고, 형 에서의 굴레에서 자유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단을 쌓았다.

 

 

[문제33-1] 다음 에서를 맞이하는 야곱 가족의 모습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야곱은 행렬의 가장 뒤에서 형을 맞이했다.

②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었다.

③ 라헬과 요셉은 가장 뒤에 섰다.

④ 야곱의 가족보다 에서에게 주는 선물이 더 앞서 갔다.

⑤ 야곱의 자식들은 각자의 생모들에게 나뉘어 맡겨졌다.

 

 

[문제33-2] 다음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에서가 먼저 달려와 야곱을 맞았다.

② 에서는 야곱을 껴안고 키스하며 서로 울었다.

③ 요셉과 라헬이 가장 먼저 에서에게 인사했다(절했다).

④ 에서는 야곱과 함께한 여자들과 아이들이 누군지 물었다.

⑤ 야곱의 선물을 에서는 자기도 가진게 충분하다면서 처음엔 사양했다.

 

 

[문제33-3] 다음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같이 길을 가자는 형의 제안을 야곱은 짐승과 자식들의 행보대로 천천히 가겠다고 하며 사양한다.

②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은 젖먹이는 새끼들이 있다는 뜻이다.

③ 야곱을 만난 당일 ‘에서’는 ‘세일’로 돌아갔다.

④ 야곱은 숙곳에 자기를 위한 집을 지었다.

⑤ ‘숙곳’과 ‘세겜 성’은 다른 지역이다.

 

 

[문제33-4] 다음 중 맞는 것을 고르세요.

① 야곱은 ‘하몰’에게서 장막 친 땅(밭)을 샀다.

② 야곱이 지불한 은 일백 개는 은 일백 세겔과 같다.

③ 야곱을 세일로 안내할 에서의 종자 몇사람이 남게 되었다.

④ 야곱 일행은 세겜 성 안에 장막을 쳤다.

⑤ ‘엘엘로헤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다.

 

 

 

암송 구절

3~4절

17절

20절

 

 

정답

[문제33-1]

[문제33-2]

[문제33-3]

[문제33-4]

 

 

적용

㉮ 야곱은 형이 눈 앞에 다가오자 급히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에서를 맞이하는 대열을 나눴다. 그것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여종들과 레아와 그녀들의 자녀들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서로 나눠보자.

㉯ 야곱은 벧엘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맡기지 못해,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벧엘 하나님을 의지했다면 어떻게 행동했으리라 생각되는가 얘기해 보자.

㉰ 야곱이 의외로 오래 머무른 곳으로 생각되는 ‘숙곳’은, 우리의 가나안(천국)을 향한 여정에서도 있음직한 ‘세상의 좋은 것(곳)’ 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지금 당신이 머무른 곳도 혹시 ‘숙곳’이 아닌지 얘기해 보자.

 

 

Copyright © 2009 by Paul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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