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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창세기35장

창세기 35장

 

35장을 읽으세요.

 

요약: 벧엘로 올라가 거하며 단을 쌓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야곱 일행은 벧엘로 올라간다. 야곱에게 나타나사 복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부르시며, 많은 국민과 왕들이 그를 통해 나오리라 말씀하신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고 죽게 된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있는 헤브론에 도착한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1절)

 

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두 가지 행동을 하라고 하신다. 그것은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라” 와 “단을 쌓으라” 이다. ‘벧엘’은 위도상 ‘세겜’보다 아래에 있다. 그럼에도 ‘올라가서’ 라고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간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거하라’ 고 하셨는데, 이것은 ‘dwell’ ‘settle’ ‘live’ 로 번역된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아예 장막을 치고 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12:8 등에서 아브라함이 장막을 친 곳에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은 것과 유사하다. 야곱은 28:22에서 서원한대로 ‘하나님의 전(집)’(God’s house)을 세워야 한다.

②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인생이 막다른 골목에 왔을 때 예를들어 하란에서 라반의 태도가 변해서 더 이상 거기 있기 힘들게 되었을 때, 바로 앞전의 사건인 세겜 성 사건이 일어났을 때와 같은 경우에 그에게 구체적 행동을 지시하셨다.

③ 숙곳과 세겜 성에서의 거주기간이 길어지고 디나 강간 사건이(이 사건을 디나와 세겜의 혼인과정상 벌어진 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잘못된 접근이다) 발생한다. 그 후폭풍으로 세겜 성이 망하게 되는 결과가 발생하고 주위가 시끄러워질 조짐을 보이자 오랫동안 참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친히 세겜을 떠나라고 하신다. 야곱은 잊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30여년 전 벧엘에서 그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께 올라가서 단을 쌓고 하나님의 집을 세워야 할 것이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이방 신상을 버리고 (2절)

 

① 구약 특히 창세기 같은 경우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신화요 허구’ 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구약은 여기저기서 오늘날에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이 부분도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을 옳바르게 섬기려면 먼저 우상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사실 (유무형의)우상을 버리지 못하고 예배시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주위를 둘러보면 알 수 있다.

② 야곱은 디나 강간 사건에서 보여주었던 소심하고 무책임하며 아들들과 충돌하는 모습에서 탈피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家長)의 리더쉽을 보여준다. “버리라, 정결케 하라, 바꾸라”

③ 야곱 일행이 하란을 떠날 때 라헬은 아버지의 우상인 드라빔을 도둑질한 바가 있다. 그녀는 아직도 그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다른 가족들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이방 신상(foreign gods)을 가지고 있었을 개연성이 있다. 또한 야곱의 집 안에 딸린 모든 가속들과 세겜 성에서 잡아 온(데리고 왔다면) 사람들과 노략물 중에도 이방 잡신(foreign gods)은 포함되었을 것이다.

④ 이방 신을 버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정결해지겠지만, 거기에 더하여 육신도 청결히 하고 의복도 바꾸는 예배자의 태도를 명령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3절)

 

  30년이면 그리 짧은 기간은 아니다. 형의 분노를 피하여 도망하며 돌을 베고 잠을 자던 그에게 나타나셔서 ‘너를 지키며 떠나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셨던 하나님을 이제 기억하고, 그곳으로 가 단을 쌓으려 하고 있다.

②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야곱은 ‘얍복 나루 씨름사건’ 으로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사람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 남은 인간적 모습을 ‘세겜’에서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그는 더 이상 하나님께 부족한 자로 남아 있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4절)

 

① 야곱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신상을 가지고 있었고, 귀고리를 했거나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귀고리는 노예가 주인에게 종속된다는 의미에서 귀를 뚫고 다는 장신구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이 귀고리를 내놓은 것을 보면 ‘이방 신상= 귀고리’ 의 등식이 나온다. 즉 이 귀고리 자체가 작은 이방 신상의 형태로 되어 있거나, 귀고리를 하고 있는 자들이 이방 잡신의 노예가 된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② 그랬기에 그런 상태로는 ‘벧엘’로 올라갈 수도 없고, 올라가서도 안될 것이다. 야곱은 이 모든 신상들을 상수리나무 밑에 묻어버림으로써 잡신들의 사망을 선포했다! 그것들은 돌이요 나무 종류였을 것이므로 이미 죽은 것들 아니 무생물(無生物) 이었지만,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서 꺼내져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는 죽임을 당한 것이다.

③ 우리들은 하나님께 열 가지를 잘못했다 하더라도, 한 두가지 행동으로 결정적인 점수를 따게 된다. 야곱도 이것으로 후한 점수를 얻게 된다. 그가 받은 복을 보라(9~12절). 그는 아브라함도 못 받은 ‘생육하며 번성하라’는 복을 받게 된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는 것에서 얻는 교훈

 

① 하나님과의 약속(서원)은 지켜져야 한다(1, 3절).

② 예배자의 태도를 알려준다(2절).

③ 세겜에서 벧엘로 올라감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집 즉 교회로의 회귀이다.

④ 야곱에 속한 자와 함께 한 자는 예외없이 다 벧엘로 올라가야 한다. 가나안에는 야곱과 함께 한 자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반드시 벧엘을 거쳐야 한다. 다시 설명하면 천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으나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꼭 거쳐야 한다. 단 비정상적인 경우 예를들어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불신자가 전도받아 예수를 믿는다면 그는 천국에 간다.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5절)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손을 써 주신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나는 야곱 일행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은 이유야 어찌되었건 피냄새를 진동시킨 사람들이었고,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의 반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오히려 그 족속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8절)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는 나오지도 않고 갑자기 그녀의 유모가 죽을 때 등장하게 된 것은 어찌된 일인가? 아마도 ‘리브가’가 처음 가나안으로 이삭에게 시집올 때 그녀의 유모도 따라왔을 것이다. 리브가는 아들 야곱이 자신의 친정 ‘밧단아람’으로 갈 때, 그곳에 익숙한 자신의 유모를 동행시킨 것 같다. 오랜 세월 야곱과 함께 한 그 늙은 유모는 자신의 주인이 있던 곳으로 가지 못하고 도상(途上)에서 죽게 된다. 이 때 야곱의 나이가 100세를 넘겼으므로 유모는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고 하겠다.

    이 부분에서 성경의 기록 방식이 특이하기도 하고, 우리네 인생이 그렇다고도 하겠다. 창세기 중 가장 길게 설명되며 화려하게(?) 등장한 ‘리브가’는 더 이상 등장하지도 않고,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고 다만 묻힌 곳만 기록되어 있다(49:31). 그런데 그녀의 유모는 죽는 때와 장소가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이름 뜻

 

① 벧엘(Bethel)- 하나님의 집(the house of God)

② 엘벧엘(El-bethel)- 벧엘의 하나님(the God of Bethel)

③ 알론바굿(Allon-bacuth)- 곡(哭)함의 상수리(oak of weeping)

  ④ 베노니(Ben-oni)- 내 슬픔의 아들(the son of my sorrow)

  ⑤ 베냐민(Benjamin)- 오른손의 아들(the son of the right hand)

 

 

성취되는 하나님의 복

 

① 복을 주셨다.(He blessed him.)(9절)- 축복하시거나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즉 10절을 포함한 11~12절의 복을 받게 된다.

② 이름을 바꿔 불러주셨다.- 32:28에서 ‘이스라엘’로의 개명(改名)을 약속하셨고, 벧엘에서 이뤄졌다.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0절)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1절)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12절)

 

① 하나님께서 17:6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그의 손자에게도 동일하게 약속하고 계신다. 차이점이 있다면, 본 장 10절과 같이 나라 이름인 이스라엘이 주어지는 것으로 그 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울왕도 다윗왕도 그 뒤의 어떤 왕도 다 야곱의 후손이다. 최종적으로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도 그의 후손이다.

② 이름을 지어주신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주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가! 우리도 우리 자녀의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부르면 부모와 자녀관계가 맺어진다.

③ 야곱은 아브라함과 야곱도 받지 못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 당시에 주셨던 복을 주신다. 그의 후손은 많고 많아져 국민을 이루게 될 것이다.

  ④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땅’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약속하신 이후에, 대를 이어 누차 주시겠다 약속하셨다. 이 땅은 최종적으로 출애굽 후에 야곱의 후손들에게 주어지게 된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메시아 언약(3:15) 즉 인간 구속사역이 완성된다.

 

 

야곱이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전제물을 붓고 (14절)

 

① 야곱이 30년 전 베고 잤던 돌을 기둥으로 세워 기름을 붓고 예배했었다. 33장에서도 설명한 바가 있지만 야곱이 쌓은 제단의 특징은 단번에 세우는 돌기둥(돌단)이 특징이다. 그는 이번에도 같은 단을 쌓는다. 그런데 야곱의 단이 의미하는 것은, 그가 세우는 자 즉 이스라엘을 세우는 시조가 된다는 의미가 있다.

② 전제奠祭(drink offering)는 모세시대에 와서 정해진, 포도주를 붓는 제사법이다(출29:40, 민15:5이하). 그런데 아브라함도 15장에서 모세시대의 제사에 선행하는 제사를 드린바 있고, 야곱도 여기서 그 시대에 선행하는 전제를 드리는 것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의 제사가 모세시대에 쓰여진 제물과 같기에, 야곱이 드린 전제물도 모세시대와 같은 ‘포도주’라고 하겠다.

③ 야곱은 또한 기둥 위에 ‘기름’을 부었다. 기름을 부음으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되고, 성별(聖別)된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가 있다. 오늘날에는 이에 더하여 성령님이 기름부어 주시는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예배 특징

    

아브라함은 장막과 단이 붙어 있어 항상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돌이 있으면 돌 단을 쌓고 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 밑에서 예배드렸다. 이삭은 그의 성격에 맞게, 묵상하는 예배를 드렸다(24:63). 야곱은 기름붓는 예배를 드렸다.

 

 

엘벧엘(7절)과 벧엘(15절)의 구분

 

    엘벧엘은야곱 일행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벧엘(1절)에 들어와 에서를 피해 도망할 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 단을 쌓은 곳을 말하고, 15절의 벧엘은 야곱 자신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던 곳에 돌 기둥을 세우고 전제물과 기름을 부은 곳을 말한다.

 미세하게 보면 다르다고 볼 수도 있고, 그 엘벧엘에 나타나셔서 10절 이하의 말씀을 하셨다면 같은 곳이 된다. 또한 1절에서 말씀하신 벧엘로 올라가라 고 하신 의미에서는 같은 곳이다.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16절)

 

①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隔)한 곳에서’ 를 쉽게 풀어보자. ‘그들이 벧엘을 출발하여 에브랏으로 가는 도중 그곳에 다다르기 전에’

② ‘에브랏’(Ephrath)은 미5:2의 ‘에브라다’(Ephrathah) 와 동일한 지명이다. ‘에브랏= 베들레헴’은 아니고, ‘에브랏< 베들레헴’이 된다(19절). 즉 에브랏은 베들레헴에 속한 지역이다(48:7에서는 에브랏을 베들레헴으로 보고 있다).

③ 앞의 31장에서 라헬은 친정에서 ‘드라빔’을 가지고 나온 것 때문에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라헬은 남편 야곱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는 점수를 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쉽지만 그녀는 베냐민을 낳는 일을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했다.

 

 

에델 망대 (21절)

 

     히. 믹달 에델(Migdal Eder). ‘에델’은 ‘양 떼’의 의미이다. 양을 지키는 망대였건 적을 감시하던 망대였건 간에, 망을 보던 파수대로 ‘믹달 에델’로 불렸다. 이것은 베들레헴과 헤브론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야곱이 에브랏에서 아버지 이삭이 있는 헤브론으로 가는 중간에 장막을 쳤기 때문이다.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22절)

 

① 말이 좋아 통간(간통)이지 이게 맞는 표현은 아니다. 간통은 같은 서열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아버지의 소실이자 이복동생들을 낳은 여인을 건드렸으므로 패륜이 된다. 현재 르우벤은 몇 살쯤 된 것일까? 그의 생모 레아가 야곱과 맺어져 바로 그를 낳았다 해도 23세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은 이 간통사건의 더 큰 책임자를 르우벤으로 지목하는 듯 하다. ‘르우벤이 가서’ 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빌하의 장막으로 찾아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② 어떤 해석에 의하면 라헬의 죽음 후 그녀의 하녀였던 빌하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할까봐 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는 너무 비약인 것 같다.

③ 한참 젊은 장남 르우벤은 자기 누이동생 디나 강간사건으로 속상해하는 모친 레아와 다른 동생들을 보았고, 별일 아닌 듯 일을 처리하며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아버지에게서 분노를 느꼈음직하다. 꼭 아버지를 골탕먹이려는 의도까지는 없었더라도, 서모 ‘빌하’를 건드림으로써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게 되었고, 야곱은 고통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④ 그 소식을 야곱이 ‘들었다’고만 성경은 말한다. 그가 화를 냈다든지 어떤 조치를 취했다는 얘기가 없다. 왜 그랬을까?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장남 ‘르우벤’은 뛰어난 아들이었음에도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장남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유다’에게 자연스럽게 승계된다.

⑤ 야곱의 빌하에 대한 태도는 살갑지 않았으리라 상상된다. 그것은 마치  옛날 왕이, 찾지 않던 후궁을 대하는 모양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만일 야곱이 빌하를 위해주고 최소한의 관심만 두었더라도 르우벤이 그렇게 행동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미 나이가 많아 화를 낼 만한 에너지도 없어졌고, 웬만한 일엔 놀라지도 않게 된 그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모든 일들이 지나고 세월이 간 후 그는 바로 앞에서 일성을 터뜨린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산다는게 뭔지….

 

 

야곱의 아들들 (23~26절)

 

 야곱의 열 두 아들을 열거한 순서는, 적자 연장자(嫡子 年長者) 순서와 서자 연장자(庶子 年長者) 순서를 따랐다.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27절)

 

 헤브론(Hebron)의 옛 이름이 기럇아르바(Kiriath-arba)이다. 헤브론은 또한 마므레(Mamre)로도 불렸다(23장 참조).

 

 

이삭의 나이 일백 팔십 세라 (28절)

이삭이…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29절)

 

① 이런 부분이 성경기록 방법상 특이한 부분이다. 이삭 시대를 서둘러(?) 마무리한다. 오랜 기간 전혀 언급되지 않던 이삭은 아들 야곱이 돌아오자 마자 죽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27장에서 본 바 있다. 이삭은 아들 야곱의 봉양을 받다가 그의 손자 요셉이 애굽의 총리에 오를 즈음 죽게 된다.

② 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말년과 죽음을 의외로 간단명료하게 기술한다. 야곱은 이스라엘의 시조로서 그의 죽음을 거창하게 기술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③ 이삭의 죽음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인생의 말년에 너무 자신을 나타내거나, 뭔가를 놓지 못하거나 등등을 하지 말아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것이다. 조용히 가는 것이 좋아 보인다.^^

 

 

 

[문제35-1] 다음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거하며 단을 쌓으라 하셨다.

② 야곱은 자기와 관계된 모든 자들에게 이방 신상을 버리라고 했다.

③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갈 때의 벧엘과 지금의 벧엘은 다르다. 즉 이것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예배의 개념이다.

④ 귀고리도 이방 신상에 버금가는 물건이었기에 상수리나무 밑에 묻은 것이다.

⑤ 엘벧엘과 벧엘은 같은 지역이다.

 

 

[문제35-2] 다음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에델 망대 근처에서 르우벤 패륜사건이 일어났다.

② 라헬은 ‘에브랏’에 못미쳐 베냐민을 낳고 죽었다.

③ 이삭이 죽었을 때 에서와 야곱이 아버지를 장사지냈다.

④ 라헬은 산고 중에 낳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했으나 야곱이 ‘베냐민’으로 고쳐 불렀다.

⑤ 이삭은 아들 야곱이 돌아오자마자 죽음을 맞이했다.

 

 

핵심 한 줄

 

⒜ 우리네 인생이 한계 상황에 내몰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도 하신다.

⒝ 예배자의 모습에 방해되는 모든 것들은 버려져야 한다.

⒞ 하나님께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 내가 타고난 성품에 따라 예배하는 것도, 100%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좋은 예배 형식이 될 수 있다.

   ⒠ 인생의 끝자락을 조용히 마무리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암송 구절

1~4절

7절

9~12절

14~15절

 

 

정답

[문제35-1]

[문제35-2]

 

 

적용

㉮ 야곱은 노년에 하란생활 말년에 이어 또 한번 가히 최대라고 할 만한 위기에 봉착한다. 그때 어김없이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셨고 피할 방법을 주셨다. 당신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 라헬은 이방 신상 문제로 하나님께 점수를 잃었고, 야곱은 이방 신상 폐기처분으로 하나님께 점수를 땄다고 생각된다. 이 견해에 동의하는가? 이 두 사람은 어떤 결과를 보게 됐는가 얘기해 보자.

㉰ 야곱은 처음 벧엘에서도 돌 기둥에 기름을 부었고(28:18), 여기서도 기름을 붓는다. 그는 28장에서 교회를 세우는 요소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려준 바 있다. 그 요소에 ‘기름부음’(anointing)도 포함된다고 보는가?

㉱ 이삭의 성경 역사 속 퇴장 모습은 쓸쓸함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고 영원한 천국이 예비되었기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변한다. 주위에 이삭처럼 조용히 퇴장하지 못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얘기해 보자.

 

 

Copyright © 2009 by Paul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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