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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창세기37장

창세기 37장

 

37장을 천천히 읽으세요.

 

요약: 이제 요셉의 시대가 열린다. 그의 이야기는 꿈으로 시작되고 그 꿈들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애굽으로 팔려가게 된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애통하며 고통받는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요셉은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된다.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1절)

야곱의 약전(略傳)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 세의 소년으로서 (2절)

 

① 35장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은,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야곱이 아버지 집에 돌아 온 즉시 이삭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라는 것이다. 본 장 1~2절을 읽을 때도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35장의 그것과 비슷하다. 즉 야곱이 세겜에서 돌아와 아버지의 머무르던 땅인 헤브론에 살게 된 바로 그 때 요셉이 17세가 되었다고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②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야곱이 아버지 이삭과 상봉할 때의 나이를 요셉의 17세를 기준으로 계산하고 있다. 그것을 인용해 보자. ☞ ‘이삭이 야곱을 만날 당시의 나이를 산출해 보면, 요셉이 17세에  애굽으로 팔려 갔고, 30세에 바로  앞에 섰으며(41:46), 그 후 7년간의 풍년과(41:47)  2년의 흉년(45:6)이 지났을 때 요셉의  나이는 39세였고 야곱은 130세였다(47:9). 그렇다면  39세에서 17세를 제하면 22년이므로  현재 야곱의 나이는 108세가 되며 여기에 야곱 출생시 이삭의 나이 60세를 더하면 현 이삭의 나이는 168세 로 나온다.

③ 이 계산법은 옳지 않다고 본다. 즉 35장 끝부분 즉 야곱이 고향에 돌아왔을 때와, 본 장 2절의 요셉이 17세가 되었을 때와는 시간적 간격이 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보지 않으면, 야곱의 세겜 거주기간이 훨씬 더 길어져야 하고, 34장의 ‘디나 강간사건’ 당시의 디나도 소녀(girl)가 아니게 된다. 즉 예를들어 20세 정도의 성인 숙녀가 된다는 추정이 성립된다. 이렇게 바꿔 생각해야 한다. 야곱이 고향에 돌아와 몇 년이 지난 후 요셉이 17세가 되었을 때, 할아버지 이삭은 168세, 아버지 야곱은 108세가 되었다. 사실 이것도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요셉의 나이 30세부터 7년 풍년과 2년 흉년이 있었고 야곱이 2년 흉년 말미에 애굽에 도착했다면 38세, 그의 나이 31세부터 풍년이 있었고 2년 흉년 말미에 야곱이 도착했다면 39세, 두번째와 같고 야곱이 2년 흉년이 지나고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해가 바뀌었다면 요셉은 40세 이렇게 되는 것이다. 결론으로 말하면 성경에서 명확히 OO세 라고 하지 않는 한, ~쯤 ~경 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④ 약전(略傳)은 앞 장의 ‘대략(大略)’ 과 같다. 우리는 앞 장에서 ‘에서’의 대략을 본 바 있다. 거기서는 에서의 후손이 쭉~ 나열되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야곱의 그것을 설명한다면서 바로 요셉의 이야기로 진행되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가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특정시대 특정인물을 들어 쓰시고 성경은 그 사실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뒷장의 ‘유다’ 이야기도 이런 방식을 취했다. 즉 택함받은 사람이 아닌 ‘에서’의 계보와 그의 후손들은 이름만 나열되는 정도로 그치게 된다.

 

 

요셉은 야곱의 하란 거주 14년쯤에 태어난 것이 맞는가?

 

 ① 야곱의 하란 거주 14년쯤 요셉이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확고한(?) 견해인 것 같다(예를들어 QA성경, 성서원刊, p57 참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해석은 31:41을 잘못 이해한 까닭에 기인한다. 즉 야곱이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해 봉사했다고 한 14년 내에 요셉까지 태어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14년이라는 기간은 야곱이 자신이 외삼촌에게 속아서 7년이면 될 일을 14년 걸렸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30:25을 야곱이 하란 거주 14년 차에 요셉을 낳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다가, ‘라반’의 제안에 6년을 주저앉게 되었다고 보면 안 된다. 이 20년을 연속된 기간으로 봐야 함은 해당 장에서 설명했다.

 ② 창29~30장은 야곱의 아들들이 생모(生母)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순차적으로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연장자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봐야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유다’가 태어나기 전에 라헬의 하녀 빌하가 ‘단’을 낳았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이제 단순하나마 계산을 해 보자. 야곱은 하란 거주 7년을 채운 후에 레아를 아내로 들였다(29:21). 그렇다면 장남 르우벤은 야곱의 하란 거주 8년차 말(末)에 태어났고, 시므온은 9년차, 레위는 10년차, 유다는 11년차에 태어났다는 계산이 나온다. 라헬 자신이 아들을 못낳자 하녀 빌하를 준 때는 레아가 4째 아들 유다를 낳은 후이다. 따라서 단은 12년차, 납달리는 13년차에 태어났다고 하겠다. 요셉이 14년차에 태어났다고 보려면 빌하와 실바가 동시에 임신과 출산을 하는 중에 레아도 합환채 사건을 통해 두 하녀와 거의 동시에 잇사갈과 스불론을 낳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니면 라헬도 거의 같은 시기에 요셉을 낳았다고 봐야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하고 틀린 것임은 너무나 자명하다. 물론 30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빌하가 ‘납달리’를 낳기 직전에 실바가 ‘갓’을 임신하는 경우도 가능하므로 이복형제들간의 차이는 줄어들고, 아버지 야곱이 같은 해에 두 아들을 보는 경우도 가능하다. 

 

 

그가 그들의 과실(過失)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2절)

 

① 성경외의 다른 책들을 읽다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과는 틀리거나 다르게 글을 쓴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2절의 이 부분도 그런 것 중의 하나다. ‘요셉이 십 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라고 하여 요셉도 분명 양치는 일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반해 야곱이 자신의 10번째 아들까지는 목자 일을 시켰지만, 요셉에게는 정장을 입히고 공부를 가르치는 등 편애했다고 쓴 경우도 있다(삶에 적용하는 구약 p90~91, 김중기 著, 두란노).

② 요셉 이야기는 시작부터 긴장과 갈등을 드러낸다. 이 갈등은 사실 요셉이 17세 되었을 때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우린 33장에서 야곱이 라헬과 요셉을 각별히 생각하는 것을 본 바가 있다. 불화의 싹은 이미 그때부터 싹트고 있었다. 요셉은 막내 베냐민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막내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소생으로서 귀여움을 독차지 했으리라.

③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은 33장에서 본 바와 같이 아버지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았다(33:2). 그들은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끔직이 생각하는 요셉이 소위 ‘감시자’로서 같이 양을 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의 ‘과실’(過失)을 개역개정은 ‘잘못’으로 바꾸었는데, 영문성경은 ‘bad report’ 라고 했다. 이것은 요셉이 아버지에게 형들의 실수와 잘못을 보고(報告)하는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단순히 말하면 요셉은 고자질쟁이 라고도 하겠지만, 아버지와 요셉 그리고 차별받은 다른 아들들과의 삼각긴장관계를 통해 장차 일을 이루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엿보게 해준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채색(彩色) 옷을 지었더니 (3절)

 

① 다른 아들들은 야곱이 젊었을 때 얻은 아들이고 요셉만 노년에 얻은 아들이란 말인가? 훨씬 늦게 얻은 막내 베냐민도 있는데… 이것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각별히 사랑하고, 아니 편애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봐야한다.

② 34:7에서도 설명한 바 있지만, 여기서도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라고 표현한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으니까 그냥 쓰는거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의미없게 넘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싸고 도는 이 일이 그냥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우리는 뒤에 알게 된다. 요셉은 애굽으로 가야하고, 이스라엘을 이루는 대업(大業)을 위해 쓰임받아야 한다. 창세기 기록자는 이점을 ‘뉘앙스’를 생각해 쓴 것처럼 느껴진다. 13~14절도 같다.

③ 채색 옷을, KJV은 ‘a coat of many colours’(여러 색상의 겉옷)  NIV은 ‘a richly ornamented robe’(호화로이 장식된 의복 또는 예복)  NLT은 ‘a beautiful robe’(멋진 의복 또는 예복)  NASB은 ‘varicolored tunic’(알록달록한 긴 옷) 라고 했다. 야곱은 요셉을 위해 특별히 이 옷을 지어 입혔다. 야곱이 요셉도 양치는 일을 시켰지만 다른 형제들과 달리 좋은 옷을 입혀 다른 대우를 했다. 이스라엘(야곱)도 요셉도 이 사소한 차별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줄 몰랐겠지만, 이 예비된 차별로 인해 요셉은 전혀 예상치 못한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4절)

 

    개역개정은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로 바꿨다. 영문 성경은 친절한 말(a kind word)을 하지 않았다 라고 하거나, 친근한 말투(on friendly terms) 즉 평화(in peace)를 말하지 않았다 고 한다. 달리 말하면 같은 아버지 밑의 자녀들이 서로 ‘샬롬’을 말하지 않는 서먹한 관계가 되었다는 뜻이다.

 

 

요셉의 꿈

 

① 왕(王)꿈 vs. 개꿈(8절,20절) à 17세의 소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아들, 그가 곡식 단 꿈과 해 달 별 꿈을 꾸게 된다. 요셉이 곡식 단 꿈 이야기를 하자 형들이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며 그 꿈과 말을 인해 요셉을 더욱 미워하게 된다. 뒤에 자신들을 ‘도단’까지 찾아 온 동생을 죽이려 하며 그들은 말한다.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형들은 요셉의 꿈을 소위 개꿈으로 치부해 버리려한다. 후일 이 형님들은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총리가 된 동생의 말에 왕의 명령을 받은 신하들처럼 쩔쩔매게 된다.

② 예언이 수반된 꿈(10절) à 17세의 어린 소년으로 아버지의 품에서 고이 자라던 요셉은 자신이 꾼 꿈 얘기를 함으로써 형들에겐 미움을 받고, 아버지에겐 꾸지람을 듣게 된다. 그런데 아버지의 예언이 동반된 꾸지람을 보자. “나와 네 모(母)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이 예언은 정확하게 성취된다(42:6).

③ 말(언어)로 바뀐 꿈(11절) à 요셉이 자신의 꿈을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본 장(37장) 이후의 역사는 어찌되었을까? 그가 말(his words)로 드러냈을 때, 형들은 시기하고 아버지는 ‘그가 한 말(the saying)을 마음에 두었다’고 했다. 사실 꿈 자체로는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다. 이것이 언어로 세상에 드러나고 행동에 옮겨질 때 그 꿈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④ 인생이 바뀌고 민족이 이뤄지는 꿈 à 자신들을 찾아 먼 길을 온 요셉을 보고 형들이 외친다.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렇다. 요셉은 꿈 꾸는 자였다. 그는 꿈으로 자신의 인생이 바뀐 사람이다. 애굽의 감옥에서도 해몽을 했고 결국 바로의 꿈까지 해몽해 주고 총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형들은 지금 그를 비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를 부러워하며 외친다.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또한 꿈 꾸는 자로 말미암아 ‘야곱’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되는 꿈이 성취된다.

 

 

네 모(母) (10절)

 

    요셉의 생모인 라헬은 죽었다. 부친 야곱은 9절에서 ‘해와 달과 열 한 별’에서 달을 모친으로 지칭했다. 상징성으로 본다면 ‘라헬’이 꿈 속의 달이 되겠지만, 현실적으로 본다면 ‘레아’가 이제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요셉의 세겜 파견 사건

 

① 이 사건을 대할 때 그냥 편하게 읽으면 넘어갈 수도 있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과연 하나님께서 일을 진행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된다. 야곱은 채색 옷을 입히고 특별히 아끼던 요셉을 100여 km 가까이 떨어진 ‘세겜’으로 보내려 하고, 어린 아들은 ‘그리 하겠나이다’ 하고 순종한다. 왜 야곱은 종들을 보내지 않고 애지중지하는 요셉을 종자(從者)도 없이 보냈을까? 헤브론에서 세겜까지의 거리를 감안하면 야곱의 아들들은 한 번 양들을 이끌고 나가면 몇 달만에 집에 돌아왔으리라 짐작된다.

② 그렇기에 야곱은 고생하는 열 명의 아들들에 대해 관심을 보여주고, 그 아들들이 아버지가 싸고만 돈다고 생각했던 요셉을 과감하게(?) 보냄으로써 아비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음직하다. 야곱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요셉이 얘기한 꿈도 한 몫 했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얘를 너무 싸고 도나보다, 좀 다르게 키워야겠다” 생각하지 않았을까?

③ 요셉은 세겜에 도착해서 형들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는 물어서 북쪽으로 20여 km 떨어진 ‘도단’으로 간 형들을 따라잡는다. 그가 만일 세겜에서 집으로 그냥 돌아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하나님의 계획표는 수정되었으리라.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8절)

 

    사실 아버지가 편애하고, 이복동생이긴 해도 고자질과 꿈 이야기 좀 했다고 멀리까지 찾아 온 동생을 보자마자 죽이려 꾀하는 형들이 너무하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33장에서 본 바와 같이 총알받이나 시키는 등 눈에 확 띄는 차별대우나 받고, 자신의 생모들이 찬밥신세로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들들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미운 오리새끼 요셉을 보자 폭발하게 된 것이다. 즉 자신들의 분노가 임계점(saturation point)에 거의 다다랐을 때 바로 요셉이 나타났고 그를 죽이려 한 것이다.

 

 

르우벤이 듣고…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21절)

아우들에게 와서 가로되…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 (30절)

   

맏형 르우벤은 살기등등한 동생들에게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피를 흘리지 말라” 고 한다. 요셉을 살려 아버지께 돌려보내려 했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그는 옷을 찢고 울부짖는다.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했던가.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5절)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28절)

 

① 먼저 ‘한 떼 이스마엘 족속’(a caravan of Ishmaelites)과 미디안 상고(Midianite traders)(이하 상인이라 함) 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4번째 소생이다(25:2). 그의 후손인 이들은 유목민이기도 했지만 무역(trade)도 했다. 이 미디안 족속이 무역단(貿易團)을 이루고 가는 무리 중에 이스마엘 대상(隊商) 즉 캐러밴이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이 두 족속의 관계를 앞에서 보아 온 대로 봐도 좋겠다. 즉 ‘이중기준(二重基準)’ 으로 보는 것이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그의 생전에 자기 서자들을 동방(동국)으로 보냈다(25:6). ‘길르앗’도 그 동방지역에 포함되는데, 비교적 넓은 지역에 거주했던 이스마엘 자손들(25:18)이 미디안 족속과 당연히 혼합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25절과 28절에서와 같이 이스마엘과 미디안을 섞어서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36절에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28절에선 분명히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요셉을 팔았다고 했는데, 36절에선 미디안 사람이 요셉을 보디발에게 팔았다고 하는데서 알 수 있다. 보기에 따라 이스마엘 사람도 되고 미디안 사람도 되는 것이다(39:1).

② 길르앗(Gilead)은 요단 동편의 넓은 땅을 지칭한다(수17:5). 이 길르앗에는 야곱이 귀향 중 지나왔거나 머물렀던 ‘마하나임’ ‘숙곳’ 등이 포함된다. 길르앗의 특산물로는 ‘향품(aromatic gum)’ ‘유향(balm)’ ‘몰약(myrrh) 등이 있었다. 유향은 여러 종류 나무들이 신진대사를 할 때나 표피에 상처를 입었을 때 흘러나오는 향기나는 진액을 가리킨다(아가페 성경사전). 이것은 의약품으로도 사용되었다(렘8:22, 46:11). 몰약은 나무에서 추출된 방향성 수지(芳香性 樹脂)를 말하는데, 향품으로써 지성물을 구분하기 위해(출30:23,29) 향수로(아1:13) 마취제로(막15:23) 장례용품으로(요19:39) 사용되었다. 이런 물품들이 무역품으로 애굽에 팔렸다.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隱匿)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26절)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27절)

 

① 지금까지 한 마디 언급이 없던 ‘유다’가 갑자기 튀어 나와 안타(hit)를 친다.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닉한다(cover up)는 뜻은 ‘살인을 감춘다’는 의미인데 특별히 아버지 야곱에게 실제로 요셉을 죽이고 감춘다는 뜻이 된다.

② 그렇다면 31절에서와 같이 요셉을 팔아먹고 옷에 숫 염소의 피를 발라 아버지에게 ‘죽었다’고 거짓말 한 것은 어찌되는가. 이것은 아버지를 속인 것일망정 요셉을 죽인 것은 아니므로 피를 은닉한 것은 아니다.

③ 손을 대지 말자는 것도 그를 죽이지 말자는 뜻이다. 물리적으로는 이미 그에게 손을 대,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넣고 팔아먹은 것이지만 유다가 말하는 의미는 그의 생명엔 손대지 말자는 것이다. 유다는 이 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후일 아버지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다(49:8~12). 한 가지라도 잘~하면 된다니깐^^.

 

 

은 이십 개 (28절)

 

    여기의 은 20개는 20세겔(shekel)을 말하는데, 중량은 약 8온스로 228그램이 된다.

 

 

요셉은 의연한 모습으로 조용히 팔려 갔는가? (23,24,28절)

 

    본 장에서는 형들에 의해 채색 옷이 벗겨지고 구덩이에 던져진 후 애굽으로 팔려가는 요셉의 태도가 기록되지 않았다. 왕의 꿈을 꾼 자로서 의연하고 당당하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모습’ 처럼 그랬을까? 답은 No 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대로 42:21 에 답이 나와 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哀乞)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야곱의 애통과 애곡 (33~35절)

 

    사랑하던 아내 라헬을 졸지에 잃어버리고, 애지중지 키우던 요셉이 죽었다는 아들들의 속임수에 넘어간 아버지는 옷을 찢고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애통한다. 그런데 참 웃기는 내용은 아버지를 속인 모든 아들들이 아버지를 위로했다는 것이다. 그게 위로인가? 쇼(show)지… 아버지는 음부(개역개정은 ‘스올’ Sheol 로 바꿨다) 내려가는 고통을 겪는다. 늙은 야곱이 지금은 고통을 받지만 후일 전화위복이 되니 감사할 일이다.

 

 

 

[문제37-1] 다음 중 가장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살고 있는 ‘헤브론’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② 요셉은 특별히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다.

③ 요셉도 이복형들과 같이 양을 쳤다.

④ 요셉은 양을 칠 때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보고했다.

⑤ 형들은 요셉에게 평안(샬롬)을 말하지 않았다.

 

 

[문제37-2] 다음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요셉은 아버지가 특별히 지어준 채색 옷을 입었다.

② 요셉은 헤브론 골짜기에서 세겜으로 떠났다.

③ 요셉의 곡식 단 꿈으로 인해 형들은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됐고 해 달 별 꿈에 이르러는 그를 시기하게 되었다.

④ 르우벤과 유다는 요셉을 살리려 했다.

⑤ 요셉은 조용히 애굽으로 팔려 갔다.

 

 

[문제37-3] 다음 중 맞는 것을 고르세요.

① 요셉이 팔려갈 때 맏형 르우벤도 같이 있었다.

② 이스마엘 사람들과 미디안 상인들은 서로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③ 요셉은 은 20 캐시타(크시타)에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렸다.

④ 길르앗은 요단강 서쪽지역을 지칭한다.

⑤ 요셉은 애굽(이집트) 왕 바로(파라오)의 시위대장(경호실장)인 보디발에게 팔렸다.

 

 

 

암송 구절

9~11절

18~19절

26~27절

35~36절

 

 

정답

[문제37-1] ②

[문제37-2] ⑤

[문제37-3] ⑤

 

 

적용

㉮ 꿈꾸는 자 요셉은 자신 혼자 외로이 길을 가야 했다. 아버지도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차피 인생 여정 신앙 여정은 혼자서 가야만 한다. 꿈 자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어쨌든 꿈 꾸는 자가 하나님의 일을 이룬다. 당신은 꿈 꾸는 자인가 아니면 그를 막는 훼방자인가?

㉯ 성경은 고맙게도 요셉을 가장 미워하고 죽이려 한 주동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대신에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려는 르우벤과 유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라 생각된다. 당신은 전자에 속하는 사람인가 후자에 속하는 사람인가?

㉰ 이스라엘(야곱)은 그의 인생 진짜 말년에 요셉으로 고통받게 된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20여 년 후 감격적으로 죽었던(?) 아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하나님의 드라마는 해피엔딩이요 멋지다. 당신도 영생을 소유한 자로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아니면 언해피엔딩(unhappy ending)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가?

 

 

 

Copyright © 2009 by Paul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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