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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고

거룩한 분노가 필요한 시대

삼상17:41~49

거룩한 분노가 필요한 시대

 

 

41.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니라 42.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43.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48.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만났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 부부 간에, 친구 사이에, 직장 동료들 사이에, 심지어는 성도들 간에도 그렇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제 경험상으로는 처음에는 아주 단순한 문제나 일에서 시작되어 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단순한 오해라든지 실수나 잘못 등을 고치거나 바로잡으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 같아 보여도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재하는 것과 주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신실한 자들로서의 삶을 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심플하게 순종하면서 산다면, 어렵고 복잡한 문제가 생기라고 해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꽤 오래 전에 친한 고교 동창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친구들이 아이들 나이가 많을 텐데, 왜 혼사 소식이 이렇게나 없냐그랬더니 그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요즘 애들이 결혼하려구 그래 어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복을 주시면서 가정을 만드셨습니다(1:28).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세계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게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도 아니고, 전 세계에서 돈을 인생의 최우선 순위에 두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돈이면 무슨 짓도 마다하지 않는 천박한 백성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물질만능주의에서 비롯된 쾌락, 이기심, 과소비 등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가정을 꾸리는 것을 경원시하고, 고생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하는 일을 회피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왜 낳아서 키워야 돼? 아이 하나 키우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베이비 붐 세대에 시골에서는 매 끼니조차 걱정했는데, 한 집에 어떻게 5~10명씩이나 낳고 키웠느냐는 말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자 명령이요 뜻입니다.

 

며칠 전에 뉴스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 유모차보다 개모차가 더 많이 팔린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모 교단 총회에서는 동물장례에 대한 문제까지 논의됐다는 소식입니다. 거기서 내린 결론이 이겁니다. ‘동물장례는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아니 이런 걸 논의해야 할 정도로 교단과 교회가 그렇게 할 일이 없습니까? 주님께서 피눈물을 흘리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리고 얼마 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들은 말이 귀에 맴돕니다. “후보자는 그렇게 인권감수성이 없습니까?” 이런 의미겠지요. 당신은 왜 이리 다른 사람들의 인권에 대해 무감각합니까? 동성애를 찬성하지 않는 후보자를 몰아붙이는 사냥개와 같은 청문위원의 공격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런 인권감수성을 논하는 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보고 해석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인권감수성이 없거나 몰랐으므로 용서가 되지만, 지금은 인권감수성의 시대이므로 용서가 안 됩니다.”

 

이런 눈으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을 멸절하라고 했으므로,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학살하는 무자비한 신이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인본주의로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 교회 내부이거나 교회 물을 먹은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대적자는 밖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멸을 명하신 이유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다만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볼까요? 우리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안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 자식을 남을 위해 비참하게 죽는 자리에 내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놀라운 사람입니다. 설령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1%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 많은 분이니 적은 분이니 이딴 소리를 할 자격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사실은 평범한 인간의 희생에 비교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태도도 같습니다. 동성애자들도 인권이 있는데 그들에 대한 인권감수성이 부족해서 그들을 포용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는 논리입니다. 무조건 동성애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한인 교회 담임목사님이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예배 시간 중에 담임목사직을 교단에서 박탈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저질러졌습니다. 현재 미국은 감리교단이 앞장서서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게이 분장을 한 목사가 자랑스럽게 강단에 서서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현실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이러한 일련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해결되고도 남는 문제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고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자꾸 개입시키다 보니 문제가 생기고 점점 더 커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한인 목사가, 성경에서도 동성애를 인정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놀라 자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거룩한 분노를 드러내고 그에 맞서 싸운 내용 중 일부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다윗과 골리앗을 알 정도로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도저히 맞서기 불가능한 상대방과 싸우게 되는 상황을 보고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도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이런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애시당초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서 이긴 일이 없다면,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싸움)이란 말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 왕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 군대에서 나와 싸움을 돋우는 자인 골리앗 앞에서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놀라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은 80킬로 쌀 한 가마니 정도의 중량으로 소위 중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었는데, 3미터 크기의 거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변변한 무기도 없었는데, 각종 무기로 중무장한 3미터 장신의 골리앗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40일을 아침 저녁으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와서 큰소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양을 돌보던 목동이었으므로, 골리앗을 만나던 그날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들판에 나가 자기가 돌보던 양을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막대기 하나만 가지고 전쟁터에 나간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러 갔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음악을 좋아하는 젊고 잘생긴 목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외모를 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그 속이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합니다. 다윗은 여호와 앞에 망령된 자(a vile man 매우 나쁜 자)를 멸시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존대하는/ 존귀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15:4).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존귀하게 여기십니까?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하나님 앞에 교만하고 악한 자들을 경멸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런 다윗이 골리앗을 보는 순간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인간적인 분노는 사람을 망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악을 보았을 때는 인간적인 분노가 아니라 거룩한 분노가 생겨야 합니다. 이런 분노는 나쁜 게 아닙니다. 다윗에게 그게 있었기에 분연히 일어나 골리앗에 맞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에게 나아온 다윗을 본 골리앗은 그를 업신여겼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와 같습니다.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된 게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었다구?’ ‘성경을 믿는 자들은 얼마나 비과학적인가...’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고 천국인지 뭔지 간다구?’ ‘천국과 지옥이 어딨어, 불쌍한 인간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골리앗이 자폭을 하고 말았습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고 멸시하는 자는 개로 불리는 게 맞습니다. 골리앗은 스스로 자신이 개임을 인정했습니다. 다윗이 쓴 시22:16,20입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골리앗은 자기네 잡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세상 잡신들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사람을 더 붙들어주십니다. 할렐루야!

 

다윗의 거룩한 분노가 골리앗에게 쏟아 부어졌습니다. 45절을 합독하겠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거구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으로 무장하고 나왔지만, 다윗은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무장하고 골리앗에게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무기 축에도 들지 못하는 물맷돌 5개와 막대기만 가졌지만, 그가 의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골리앗을 쓰러뜨리셨습니다. 할렐루야!

 

골리앗은 다윗의 살을 새와 들짐승에게 주겠노라 했지만, 그 반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거룩한 분노는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이 되었고, 그 결과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선포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리라. 둘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셋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분노를 드러낸 다윗에게 골리앗을 넘겨주셨습니다. 다윗이 던진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고, 그는 쓰러졌으며 자신이 의지했던 칼에 목이 잘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시대를 상징할만한 두 개의 용어를 들려드렸습니다. 개모차와 인권감수성입니다. 여기엔 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거역하려는 시대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설마 했던 일들이 이제 드러내놓고 당당히 추진되어질 것입니다. 사법부인 대법원에서는 이미 동성애를 합법화하기에 이르렀고, 입법부인 국회에서도 그렇게 될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갔던 멸망의 길을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따라가려 하고 있으니 인간의 어리석음은 무한대입니다. 미국 교회는 이미 벨리알을 본격적으로 따르기 시작했고, 한국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3가지만 버리고 막으면 소망이 있겠습니다. M~, S~, LGBTQ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았듯이 거룩한 분노를 표출한 다윗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반대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분연히 일어나 거룩한 분노를 표출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사탄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행여라도 나의 육체가 하나님을 거역하려고 할 때, 내 영혼은 말씀으로 무장하여 거룩한 분노를 드러내고, 내가 나를 이길 수 있도록 늘 깨어 있기를 기도합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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